하느님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계실 뿐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면 하늘뿐 아니라 땅에도 계시고,
성당에 뿐 아니라 술집에도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불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능성 또는 인간의 가능성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가능성을 자기 또는 인간의 가능성 안에 가두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넘는 것은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이것은 마리아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믿으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쁜 가능성은 믿지 않지만
마리아처럼 좋은 가능성은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셨다고,
이천 년 전에 한번이 아니라 지금도 오신다고,
마리아에게뿐 아니라 사제와 우리에게도 오신다고,
베틀레헴의 구유뿐 아니라 미사 때 제대 위에도 오신다고 믿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려고 오시는 그 첫 번째 오심이 믿기 어렵지,
그렇게 오신 주님께서 매일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고,
최후 만찬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그 천 번째 희생이 놀랍지
매일 당신 살과 피를 나눠주시는 것은 그 재현일 뿐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의 애송이가 아닌 우리에게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사는 것이 어렵지, 믿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나를 다 내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만찬 때 우리가 읽는 복음은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의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의 뜻도 있고,
제자들의 배반을 아시고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당신을 전부 다 주시는 사랑을 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겸손과 사랑에 감탄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가자는 뜻으로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알고 주님도 아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 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살기를.
다 못살 바엔 아예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살기를.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그대로 다 살지 못하더라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조금이라도 살고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