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 화요일-2021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은 주제와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오늘 말씀인데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도 거기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은 어디로 갈 건지를 일부러 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옛날에 ‘어디로 갈거나’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그때는 이 노래가 우리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과도 어울려서,
그리고 꽤 철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가끔 흥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저 감상에 젖어 흥얼거린 것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디로 가는 것과 관련하여 옛날의 저는 이 세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세상을 넘어 어디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복음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고,
초월하였기에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친 얘기라면 한 발은 이미 저 세상에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기인데, 보통 양다리 걸치기는 안 좋은 뜻이지만
지금 저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한 발 딛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발을 확실히 담그고 있는 곳은
언젠가 가야 할 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몇 주 전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일 저일 벌이기보다는
하나라도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후배들에게 이롭지 않겠냐는
충고를 들었는데 저를 콕 찌르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겐 오래전부터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지론이 있는데,
그것이 저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경계했던 것이 제가 시작한 일 제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제가 시작한 일이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주란 편안함에 대한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안주하는 것도 있고
남자에게는 일에의 안주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제가 시작하고 하던 일을
즉시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때이고,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게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선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치면 떠나길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늘 물으며 살아야 하고,
간다면 골로 가지 않고 아버지께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