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복음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자
주님께서는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에프라임으로 피신하시는데
파스카 축제일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겠냐고 기대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어제 복음은 끝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그들의 기대대로 오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가 그들의 기대와 같은 것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의 기대는 이스라엘 다윗왕의 자손인 임금의 입성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헛된 기대이고 그 기대는 허망하게도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실은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그들과 같습니다.
각오는 잘하지 않고 기대를 많이 하는 우리지요.
그런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행복하려면
기대는 조금 하고 각오를 많이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니, 기대는 아예 하지 말고 각오는 최대한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기대가 깨지거나 무너진 적이 한두 번입니까?
오래 살았으면 살았을수록 우리 인생은 반反 기대의 인생이었잖습니까?
그래서 악을 각오하면 행복할 것을, 선을 기대하여 불행해지지 않았습니까?
최악을 각오하면 언제나 행복할 것을, 그렇게 매번 배반당하면서도
또 기대하고 계속 기대하여 아직도 불행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기대는 죽어야 그만두게 되는가 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기대는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계속 이럴 겁니다.
사랑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꽃길만 있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꽃길만 걸을 수 있겠습니까?
꽃길만 걸을 수 있더라도 그 길만 바라는 것은 낮은 등급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이요 참사랑은 가시밭길을 걸어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이고
가는 길에 돌을 만나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 삼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꽃길을 걷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을 보면
꽃길은 나를 참 행복으로 인도하는 참사랑의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십자가 길을 가려는 곧 수난을 감수하려는 사랑이 참사랑과 참 행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면 고통이 달다는 말은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고통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받는 고통은 받아도 행복하기에 달다는 말이고,
사랑 없이 고통을 받으면 고통이 불행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참사랑을 일컬어 라틴말로 Passio,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은 Passio Christi 또는 Passion of Christ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는 참사랑을 하면,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참사랑을 하면,
자기만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고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참사랑을 많이 묵상하고 본받으려는 오늘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가 위의 주님께서 받은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똑같이 느끼고,
그 고통을 감수케 한 주님 사랑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하는 사람도 되어야겠습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