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그 죽음은 하느님 자녀들을 모으고 하나로 만들기 위한 거라고
오늘 전례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나 이제 떠나가 살던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한 민족으로 만들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실은 죽음이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개죽음은 절대로 하나로 모을 수 없습니다.
개죽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아무런 의미 없이 죽은 죽음이지요.
죽었는데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죽었는데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고,
죽었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하다면.
그러므로 사랑하기에 죽고 그 죽음이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남아야,
그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죽음이 흩어진 하느님 자녀를 하나로 모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고 사랑의 죽음이고 사랑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인데
정말 주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남아 모두를 하나로 모을까요?
주님의 죽음이 모두를 위한 사랑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남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당장 주님을 죽이려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민족을 무너뜨릴 자라고 생각하기에 죽게 하지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새로운 미사 경본의 성변화 부분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곧 이전 경본에서는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했었는데 새 경본에서는 “모든 이”를 “많은 이”로 바꿨지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모든 이가 아니고 많은 이라면 주님 사랑에 예외가 있다는 말인가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이 말은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죄를 사하고
하느님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돌아가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처럼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님도 어쩔 수 없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로 모으신 것이 아니며 한 마디로 실패지요.
여기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나는 받아들이는가?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희생이요 사랑이라고 느끼는가?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사랑 불감증으로 인해
나는 주님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이고,
모든 이를 위한 죽음이 아니게 만드는 것일 겁니다.
저로 말하면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사랑으로 돌아가신 것은 분명한데
모든 이를 위한 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 사랑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함입니다.
사랑 불감증도 어느 정도 있고,
사랑 이기주의도 있음을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