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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순간의 십자가 : 로몰로 타바니(Romolo Tavani)

by 이종한요한 posted Mar 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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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해 뜨는 순간의 십자가(Cruxifiction at Sunrise)
   가 : 로몰로 타바니(Romolo Tavani​)
   기 : Stock Photo, 11931X5792 픽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과 핵심은 바로 부활 신앙이다.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크리스천들은 부활 신앙을 믿고 이것을 그 시대 상황에 맞게 해석 선포함으로써 공감대를 확인한 사람들이 늘어나게 하는 것을 바로 선교의 중요 목표로 보았다.

한마디로 우리가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가장 치욕적이고 억울한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가 전한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요 근간으로 볼 수 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1코린 15,3-6)

 

이렇게 명백한 부활 신앙인데도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부활의 묘사는 너무도 일관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하시는 현장을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고, 부활하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나, 제자들이 생업인 고기잡이 순간에 현장에 나타나셨다는 것 등, 거기서 잡은 생선을 함께 잡수셨다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으로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전체이다.



또한 목격 증인 역시 일관성이 없다.

마태오 복음에는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 두 명이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마태 28,1-2), 마르코 복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등 3명이 무덤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마르 16,1-2)

그러나 주님 부활을 확인한 시간이나 부활의 목격 증인이 차이가 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부활과 같은 사실을 처음 확인했던 사람들이 받아야 했던 충격으로 이들이 정확한 시간이나 목격 증인의 수를 정확히 기억한다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건 착오가 생긴 것이 오히려 이 사건의 진실성을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목격 증인들을 조작할 뜻이 있었다면 서로 말을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전개했을 텐데, 성서의 기록처럼 차이가 나는 것이 오히려 이 사건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타당한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그린 성화는 하나같이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회화화 시킨 것으로 일관 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는 순간에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러떨어지면서 지키던 군인들은 혼비백산이 되었다는 것이나, 부활하신 주님은 흰옷을 입으시고 손엔 생명의 상징인 십자가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이 부활 성화의 대종이다.

작가는 이탈리아 출신의 현존하는 사진작가로서 과거 전통 표현 방법과 전혀 다른 사진 기법으로 부활에 대한 작품을 제작했다.

현대에 와서 사진 예술이 발달하면서 부활의 현장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사진을 매개로 표현하는 예술 활동을 통해 단순한 현장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가 설정한 구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부활 신앙의 현대적 의미에 참신하게 접근하게 했다.



단순히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고자 시작된 사진 예술은 1900년대 초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의 노력으로 예술의 분야로 승화되면서 그는 '현대 사진술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그는 사진술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승화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는 사진이 그림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 부활은 이천 년 전 사건이기에 사진으로 표현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으나 작가는 자기들의 노력과 표현으로 어떤 인간이 창작한 예술 분야 못지않게 예수 부활의 실상과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진이 단순한 삶의 기록물 수준이 아니라 오늘날은 예술의 중요 분야로 정착시켰다.



작가는 예수 부활의 성경 기록을 재현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기만의 부활의 의미성을 골고타에서의 예수님이 겪으신 비참한 수난과 부활이 실현된 구체적 장소인  빈 무덤의 현장을 연결해 부활의 의미성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처럼 이 작품은 바로 사진 예술이라는 상상이나 감성 표현을 통해 작기가 생각하는 부활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예술적 표현을 직관적 지식의 영역으로 보았으며 이것은 지성적 교육이나 암기를 통한 습관적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지식과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 여겼으며 직관적인 지식이 삶의 진실을 표햔하는데 더 유용한 것이라 여겨 자신의 사진으로 이것을 표현했다



예수 부활 기사에 있어 루카 복음 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루카 24,1-6)



작가는 여기에서 여자들이 무덤으로 갔을 때 주님의 시신은 무덤에 없었고, 천사를 통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에서 즉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에서 그분의 부활을 확인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을 확인한 제자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서로 다른 부분을 전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시신을 수습할 때 사용한 물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요한 20,4-7)



예수님은 생전에 여러 차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으나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따르는 어떤 인간들에게도 비길 수 없는 유능하고 기적까지 행할 수 있는 분이 인간으로서 가장 비천하고 무능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을 못 하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너무 상심하고 그동안 예수의 제자로서 느꼈던 자존심이 깡그리 박살이 나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비록 당시 사회의 하층민 신분이었으나 예수님 제자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긍정적 차원에서 신분 상승의 자부심을 느꼈는데 예수님이 너무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면서 한마디로 공황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허황한 감회에 빠졌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이런 절망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골고타 언덕과 주님의 부활이 시작된 무덤의 두 장소성의 상반된 특성을 제시하면서 부활 신앙이 주는 크리스천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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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풀포기 하나 없는 황량한 구릉에 십자가 셋이 서 있다.

거기에 달렸던 죄수들은 다 처치한 텅 빈 십자가는 더 없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이 빈 십자가는 그 자체로 죽음에 대한 강한 암시를 주고 있다.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강한 암시를 주고 있다.



생명을 전혀 느끼기 어려운 죽음의 상징이다.

골고타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장소이나 그 근처 어느 곳에도 생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모습이 죽음의 상징과 같아 현세 삶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허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정치 종교 경제 등 모든 것이 집약된 곳이고 여기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인간이 못내 동경하는 권력과 번영의 공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이런 장소가 얼마나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장소임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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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앞에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이 있다.

물론 그 무덤엔 예수님의 시신이 없고 그 시신을 수습했던 아마포 천이 예수님의 무덤이었다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빈 무덤에 푸른 생명이 만개해 있다.

무덤은 죽음이 있는 곳이기에 생명과는 반대되는 공간이나 이 빈 무덤은 예루살렘과 전혀 다른 강하고 생기있는 생명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수건 한 장이 놓인 것이 예수님이 묻힌 곳임을 암시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생명이 충만한 푸르른 공간으로 변모되어 있다.



무덤은 어떤 것이든 거기에는 시체가 있다는 것에서 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인데, 예수님의 무덤은 반대로 빈 무덤이라는 게 특징이다.

이 세상 무덤 중 유일하게 빈 무덤이기에 의미가 있는 곳이 예수님 무덤의 특징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거나 아니면 세월이 흘러 시신이 부패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부활한 생명을 무덤에 만개한 생명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 빈 무덤은 가톨릭교회가 지녀야 할 존재성과 정체성을 너무도 확실히 전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의 생명을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이것의 비중에 따라 교회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법이다.



가톨릭교회 역사는 예수의 부활한 모습을 증거하기 위한 긴 노력의 역사였다.

초대교회부터 시작된 순교자들은 가장 강렬하면서도 순수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여러 계층의 신자들이 순교를 선택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고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동참하기 위해선 현세 생명조차 버릴 줄 아는 대범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교회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고 또한 자랑스러운 부활 증인들의 역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부활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는 아니었다.

부활한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한 빈 무덤 보다 예수의 시체를 보관하는 무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교회는 더 없이 침체하고 더 나아가서 시체의 악취를 풍기는 집단이 되었을 때도 있었다.



교회가 예수님 사랑의 순수한 계명의 실천보다는 무슨 규정이나 법규 제도들을 더 우선시하면서 복음을 떠들 때 교회는 어이없이 부패했다.

한마디로 부활한 예수님의 생명보다 인위적인 사고방식이나 조직 강화를 목표로 했을 때 교회는 부패했으며 이 세상 어느 공간보다 더 서글프고 추악한 죽음의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오늘 우리 가톨릭교회가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보다 더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부패에서 교훈을 얻은 소위 말하는 회개한 집단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 기득권자가 되면서 순교의 희미가 퇴색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수도 생활이 나와서 교회가 지녀야 할 생명을 바치는 복음의 향기를 증거하게 되었다.



수도 생활은 교회 유지에 필요한 인력 보충 조직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증거하는 조직으로 탄생했으며 수도 생활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서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자기 집단의 몸집 늘리기나 교회의 하수인으로서 전락했을 때 참담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예나 오늘에나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보일 수 있는 빈 무덤의 역할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것은 말로 떠들거나 거창한 행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때 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고 있는 중요 요인이다.



가장 버려진 한센병 환우들이 있던 소록도에 들어가 43년을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가족처럼 돌보고 치료해주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없다고 여겼을 때 이들은 그들에게 짐이 되기보다 조용히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신 마가렛 수녀와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에서 환우들에게 “할매”라는 애칭으로 이들의 가장 가까운 누나 언니 어머니로서의 삶을 사셨기에 이들의 삶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감동의 기억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사도행전은 이 면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작가는 기록물 보관용으로 여기기 쉬운 사진 기법을 통해 그동안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예술적 표현을 할 수 없었던 직관적인 방법으로 과거의 여러 화풍이 작가들이 표현했던 사실 묘사 위주의 방법이 주지 못했던 부활의 생기를 선사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이 작품을 보면 부활 신앙의 명료성이 어떤 작품보다 더 생기있게 다가오게 된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때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모든 참 직관이나 참 표상은 바로 표현이라는 말을 긍정하면 이 작품은 현대적인 감성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명쾌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좋은 작품이라도 볼 수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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