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
특히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는 유다를 비난하기보다는 변호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그것은 공범자의 심리라고나 할까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가 아니라
그 배반자가 저이고 유다가 저라고 인정 아니 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유다의 입장에서 배반을 애기하고자 합니다.
비슷한 뜻의 두 말이 있습니다.
<배신>과 <배반>입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주님은 유다에게 배신을 하였고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배신이란 믿음을 저버리고 믿음과 반대되는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유다의 믿음을 저버리신 것이고
제 생각에 주님이 먼저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어떤 믿음에 주님은 배신을 한 것일까요?
유다는 이 세상 구원자로 주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나쁘게 얘기하지만 제 생각에
유다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 컸던 사람이고
주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시는 것을 보고 주님을 따랐으며
정의가 꽃피는 이 세상을 건설하는 임금이 되실 거라고 믿었을 겁니다.
그러니 유다는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의가 꽃피는 세상을 바랐던,
아주 괜찮은 사람이고 단지 믿음이 잘못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우리도 모두 이런 정의와 평화의 임금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배신감이 배반으로 이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일 뿐입니다.
헌데 유다의 믿음에 배신한 주님은 유다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에 예수님도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유다를 믿었고 그래서 유다에게 돈지갑을 맡겼겠지요.
요한복음은 돈을 유용한 나쁜 사람으로 얘기하지만
주님께서 유다에게 돈지갑을 맡긴 것은
사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이면에서 믿으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배신감에 있어서는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도 주님도 서로를 잘못 믿은 것이고
그래서 배신을 서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배신이 문제가 아니고 배반이 문제입니다.
네가 배신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잘못 믿은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그의 배신이 아니라 나의 배신감이 문제라면
배신감 때문에 사람을 배반하는 것은 추가적인 잘못이고 죄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믿음에 대한 반대 짓인 배신은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반대인 배반은 정말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유다를 보며 몇 가지 저를 돌아봅니다.
나도 유다처럼 주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유다처럼 나에 대한 주님의 믿음에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도 유다처럼 배신감 때문에 주님을 배반까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