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구원이라고 믿는가?
내 믿음의 토대는 인류 구원에 대한 속죄 이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참여적 신비에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렀다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인과응보와 사후에 받게 될 처벌과 보상이라는 틀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러한 틀을 삼위일체 하느님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아버지(루가 15장)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과응보의 틀로 잃었던 아들에 대한 비유를 작은아들에게 적용해보면 작은아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죄를 묻지 않았을뿐더러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또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15)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병이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가르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존재로서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하느님 나라의 현재로서 경험합니다. 그러나 속죄 이론의 관점에서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써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고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한다면 아버지 성부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어 화가 나셨고 그 화를 풀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한결같이 용서하고자 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자유가 사라집니다. 이러한 이론은 무한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을 인과응보의 틀로 하느님을 가두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틀에 갇혀계실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제속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 강의해 오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도록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과응보의 틀이 사후에 받게 될 처벌과 보상을 결정하도록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지키고 많이 바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언제나 따라다니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한시도 편한 날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을 하느님과 거래하는 것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조금 바치면 조금 받고, 많이 바치면 많이 받고, 안 바치면 아무것도 안 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종교심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사랑이 커지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사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믿음의 현장에서는 신뢰와 사랑으로 변화하는 관계만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반사되는 선을 보고 변화하는 것이지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빚을 갚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수난과 죽음의 길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참으로 나의 벗이 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 상거래식 구원론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자만심의 현재를 보여줍니다. 인과응보의 틀을 하느님에게 투사시켜 인간의 분노를 하느님의 분노로 만듭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는 분노의 흔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구원론은 일종의 대가적 논리와 정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보복하는 정의입니다. 우리를 생명 넘치는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은 용서로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시는 데 그러한 하느님을 분노하시는 하느님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려면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보복하는 정신을 우리 내면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너를 살리기 위해, 네 몫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용서하는 자비가 흘러가도록 관계를 돌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한 과정에는 언제나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이 있습니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하는 폭력 대신 구원하는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거부당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하느님이 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버림받음의 경험 안에서 우리와 연대하십니다. 하느님은 멀찍이 안전한 곳에서 우리의 고통을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어떻게든 우리의 고통과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나오는 은총과 과분한 자비를 충만한 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의 혁명은 대가를 치러야 할 빚문서를 없애버리셨습니다. 보복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허용하고, 놓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관계를 비추고 우리는 그 빛으로 영감을 얻어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면서 구원을 경험합니다.
용서가 자리 잡은 땅, 자비가 흘러가는 땅에서 생명이 움트고
생명이 만발하는 거기에 너와 나의 구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