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
오늘 창세기는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다 좋다고 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시 떠오르는 것이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서
혼족이니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말이 유행이고,
방송도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엔터테인먼트 식으로 방영하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 중에 그런 프로를 보고 즐기는 사람이 많나 봅니다.
또 즉시 떠오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고립의 정신’을 크게 걱정한 내용입니다.
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 다 ‘고립의 정신’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혼자 살지만, 고립을 살지 않고
가족에게 매이기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 경우 그것은 고립의 정신을 사는 것이 아닐뿐더러
혼자 살 줄 모르고 의존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훨씬 잘 산다고 해야겠지요.
의존적인 행복은 의존적인 불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이 있듯이 혼자서도 잘하는 것은
이런 의존적인 불행과 미성숙을 넘어서는 행복한 성장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보기에 좋지 않은 ‘혼자’는 고독이 아니라 고립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립 특히 고립의 정신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혼자’를 말하는 것이고,
부담감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공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언인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지 아무도 없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지.
가끔 죽음 이후를 생각할 때 저는 하느님도 안 계시고 아무도 없는
저 캄캄한 우주 공간을 생각하고 저 혼자 떠도는 것을 상상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있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러다 누구 하나를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고 외톨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이라는 것을 놓치는 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것이고,
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랑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공존을 선택할 것인가? 고립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두려움을 선택할 것인가?
같이 있을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혼자 있으면 기뻐할 일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