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는 번수로 해서는 안 된다.>
번수를 헤아리며 용서를 하면 왜 아니 되는가 하면
진정한 용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용서에 실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번수를 따지는 것만큼 번번이 실패할 것입니다.
왜 실패한다는 것입니까?
번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용서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태도이고.
소극적인 태도이며, 의무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용서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번수로 용서하지 말고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마음으로 한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용서치 않으면 내 마음 편치 않기에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으로 용서하고,
매일 보는데 계속 껄끄럽게 지낼 수 없어 마지못해서 용서하며,
사람들이 보는데 계속 용서치 않는 사람으로 있을 수 없어
떠밀려서 용서한다면 그런 용서는 시늉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라야 용서인데
사랑이 마음까지 들어가 마음이 하는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사랑이 마음에 들어가 그 마음에 가닿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마음에 와 닿아야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채워져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해야 용서가 마음으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비유로 든 그 무자비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것으로 그칩니다.
빚만 탕감 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주인의 사랑이 그 마음에 가 닿지 않은 겁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용서가 아니고
용서하고 나니 너무도 사랑하게 되는 용서가 아니면
앞서 봤듯 그 용서는 용서의 시늉이고 변죽을 울림이며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에 밀려서 하는 용서일 뿐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한다고 했는데도 사랑까지는 할 수 없다면
아직 그를 진정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거나 용서를 포기하지는 말 것입니다.
사랑까지 하는 완전한 용서는 못하였어도
용서하려는 큰 결단에 이어 시작까지는 한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용서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그런데 이런 용서도 생각해봅니다.
내게 엄청난 잘못을 한 사람에 대한 용서도 있지만
내게 한 잘못은 없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주는 것 없이 괜히 미운 사람에 대한 용서 말입니다.
내가 크게 원수지고 용서 못할 사람은 없으니
우리 일상의 용서는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괜찮다”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숨쉬기가 편하더군요. 그때 터득한것이 피하지 않고 얼굴을 마주보고 견디어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원수는 없고 벗이 옆에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