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태어나시는 땅
왕이 되려는 갈망을 넘어 스스로 왕이 되어 왕권을 넘보는 이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문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왕들이 되어 왕들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허물어진 관계들, 그 안에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왕이 탄생하셨다.
가난하신 하느님이 인간과 처음 대면한 장소에서 연약한 아기로 포대기에 싸여 계신 분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신비, 인간에게 맡겨진 존재로서 한없이 낮추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불러온 관계의 혁명, 동반과 부축의 대혁명이 말구유에서 시작된 것이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1, 51-53)
교만한 자를 흩으시는 것은, 전능한 힘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전능이다. 전능을 통제를 장악하는 힘으로 인식하게 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만 일하시기 때문이다. 선의 흐름을 막고 통제를 장악하려고 하는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만심에 빠진 인간들이다. 자아도취에 중독된 이들이 하느님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만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듯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 짓고 그들보다 더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성숙한 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도의 도덕적 바탕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더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기도와 희생을 동원하여 경쟁하고 비교하려고 밤잠을 설친다.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것도 힘으로 하시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과 연결되면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은 스스로 내려오고 보잘것없던 사람도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으로 인하여 사랑받게 되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시는 것 역시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랑에서 나온다. 내어주는 사랑을 배운 이들이 배고픈 이들을 돌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은 매력으로 끌어당겨 당신과 연결되도록 이끌어 주신다. 하느님과 연결된 이들로 관계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내가 할 일이지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다. 성모님께서 하신 일이 그 일이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도구적 존재로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1코린 6,20)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입니다.
거룩한 모범과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성프란치스코가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Ⅱ53
동등함과 평등함의 땅에서 피는 자비의 꽃, 받아들이고 내어주는 놀이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리는 자유의 꽃, 내려가고 낮아질수록 아름다운 가난과 겸손의 꽃, 사람에 대한 깊은 존중과 선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매력의 꽃향기, 기쁨의 꽃들이 관계 속에 피게 되면 주님이 태어나신다. 주님이 태어나시는 땅이 거기에 있다. 말구유 안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인간의 돌보심에 자신을 맡기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의 전능이 거기에 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인지를 아는 방법은 단순하다. 선의 흐름 안에서 자신을 보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힘없는 이들,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 바닥을 사는 이들, 낮은 자리에 머무는 사람과 단순한 사람에게로 이끌려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인가를 확인해보면 안다.
영적 기쁨은 전적으로 내면의 일이다.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기뻐하는 이의 환한 얼굴과 눈빛이 하느님의 얼굴을 반사한다. 하늘이 땅에까지 내려와 땅이 하늘로 가득 차 있는 육화의 신비 안에서 선한 것을 꺼내어 먼저 건네는 존재의 토대,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는 변화가 그분을 낳는 일이다. 하느님의 내적 생명이 관계성 안에서 우리를 변모시켜 너와 나 사이에 흘러가게 하는 거기에 신적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를 보는 것이다.
2022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