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루카 복음은 미나의 비유로서 마태오 복음의 탈란트의 비유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비유입니다.
탈란트의 비유에서는 탈란트를 더 받기도 덜 받기도 하는 데 비해
미나의 비유에서는 똑같이 한 미나를 열 사람이 받습니다.
이 비유에서 미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저는 오늘 비유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 비유를 대입시키니 인생 결산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내가 준 사랑 한 미나를 일생 어떻게 관리했냐고 주님께서
비유의 주인처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성찰해 보니 아버지 없어서 가난하고 고생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한 사춘기 때를 빼고는 한 번도 비유의 마지막 사람처럼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반대로 사랑의 하느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입버릇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며 사랑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봉사자들과 하루 식당을 여는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가득히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이웃과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
그런데 이렇게 지향을 두고 입으로는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지만
실제를 보면 저의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때가 많음을 보고,
반성이랄까 후회를 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런 반성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너도 비유의 마지막 종과 같이 한 미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어!
저는 비유의 그 종처럼 주님을 냉혹한 분으로 알고 있지 않고
사랑의 주님으로 알고 있고, 그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사랑으로 사랑치 않고, 내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바로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 주님의 사랑을 받고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그 사랑을 고이 수건에 싸 두는가?
그 사랑을 뭣에 써먹으려고 그렇게 고이 간직하고 있는가?
혹시 나만 그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은 아닌가?
마치 형제와 나누라고 부모가 준 돈을 형제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쓰려고 지갑에 또는 금고에 숨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제게 그럴 마음은 결단코 없지만
주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음은 결과적으로
주님 사랑을 수건에 싸 둔 것이 되겠지요.
저는 오늘 이것을 묵상하고 반성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냉혹한 분입니까? 사랑이십니까?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