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동체의 일치를 얘기한 바오로 사도는
오늘 공동체의 성장에 대해 이어 얘기하는데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총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그러므로 공동체의 성장도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의 성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일반 공동체와 분명히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그러기에 공동체의 일치도 일반 공동체와 달라야 하고,
공동체의 성장도 다른 공동체와 달라야 합니다.
다른 공동체는 예를 들어,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그래서 몸집이 불어나는 것이 공동체의 성장이 되지만
우리 교회 공동체는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그 성장을 다 얘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공동체 성장의 한 부분이지만
각 신자가 신앙에서 성숙해지는 것이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는 몸의 성장이 팔다리 숫자가 두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고,
위가 하나에서 소의 위처럼 네 개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체가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인 것처럼
그리스도 몸의 성장도 각 지체가 어른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주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각 직책자가 자기 역할을 잘하게 되는 것이 성장입니다.
이때 공동체와 개인의 성숙한 관계는 공동체 성장의 필수적입니다.
성숙한 공동체의 공동체는 개인의 성장과 성숙을 도와주고,
성숙한 개인은 자기의 성숙과 성장이 자기실현이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이 목적이고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 자기를 내어놓습니다.
그렇다면 미성숙한 공동체는 그 반대겠지요.
공동체는 개인의 성장에 대해 별 관심이 없고 키우지 않고,
개인도 공동체의 성장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실현에만 힘씁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한 신부를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게 했더니
그것으로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쓰지 않고,
그저 자기 명예나 수입의 수단으로 쓰고,
그래서 교회는 신부들의 전문적 양성에 소홀하거나 소극적인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성장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힘도 없고, 그래서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밖에 모르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신앙의 어른은 자신과 공동체를 따로 떼어 생각지 않고
모두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 데 있어서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가 공동의 목표가 되고,
모두 이 경지에 이르도록 서로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란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
그리스도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잘 알고 선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지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