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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2주 수요일- 섬김과 보살핌

by 김레오나르도 posted Feb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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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김과 보살핌>

 

 

우리가 자주 사랑에 실패함은 왜일까?

 

 

물론 우리 안에 줄 사랑이 없어서이고,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은 하느님께 사랑을 청하여 받지 않기 때문이지만

어떤 때 우리 안에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너무도 강렬한데도 사랑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사랑이 미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해서 실패하는데

많은 경우 사랑에 겸손이 밑받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섬기는 사랑과 보살피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보살피는 사랑은 그래도 잘하는데

섬기는 사랑은 여간해서는 잘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분명 그렇습니다.

 

 

화분의 화초를 가꾸고 병든 강아지를 돌보듯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라면,

나의 보살핌에 감사하고 잘 따르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라면

나의 사랑은 그에게 보탬이 될 뿐 아니라

내게도 큰 만족 되니 이런 사랑은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보살펴줬는데도

그가 기꺼이 또는 겸손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나의 사랑은 분노로 바뀌고 심한 경우

보살핌을 거두고 파괴적으로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피는 사랑보다 섬기는 사랑이 더 어려운 이유이고,

정작 모셔야 할 부모는 모시지 않고

개는 반려견이다 애완견이다 하며 데리고 사는 이유입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살핌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마지못한 듯 받아들이고

필요한데도 필요치 않은 것처럼 까칠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섬기기 위해서는 사랑에 겸손이라는 덕을 함께 갖출 뿐 아니라

이런 교만이나 까칠함이나 심지어 포악함까지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점잖고 고상한 사람에게는 겸손한 사랑을 하나

아니, 그저 보통 사람에게도 겸손하게 사랑을 보이나

감당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면 피하는 것이 보통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자기 혼자서는 얼마든지 겸손하고 사랑에 충만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면 이제 와서 젊었을 때처럼 교만하게 나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죄스런 나에 대해서 한껏 겸손하고

욕심스런 사랑을 할 만큼 힘이 넘치지도 않기에 작은 사랑에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에 대한 겸손은 있지만

너에 대한 겸손, 그것도 무례한 사람에 대한 겸손은 없고,

그를 섬기는 사랑, 그를 감내하는 겸손한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하는 분들에게서도 비슷한 애기를 듣습니다.

젊었을 때는 남편과 아이들의 온갖 귀찮은 것 뒷바라지를 했는데

나이 들어 60이 넘어서까지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고.

아이들은 그래도 좀 감내하겠는데 남편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아무튼 섬김은 고통을 감수하는 겸손과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우리를 섬기시겠다고 하십니다.

헌데 주님의 섬김을 받는 게 마냥 고맙거나 편하지만은 않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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