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징은 믿음과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확신을 얻기 위해서
요구하는 것이 표징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거짓 예언자나 거짓 메시아가
많았던 것을 기억하면,
그들의 요구가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표현하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을 보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다시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남방 여왕은 지혜를 들으려고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참된 것을 찾아 그것을 얻기 위해서
먼길을 마다하고 달려왔습니다.
즉 요나와 솔로몬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고 지혜를 찾게 되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지
표징으로 드러난 사실은
믿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표징을 믿음과 연결됩니다.
믿음과 연결되지 않는 표징은
단순한 이야깃거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믿으려는 마음이 없는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아무리 옳고 좋은 말을 해도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하나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말은 단지 남의 말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기를 원할 때,
더더욱 그렇게 나타납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들어야지
내가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닙니다.
대화를 하지만
서로의 말은 겉돌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는 의지는 점점 없어집니다.
인간 관계에서 오는 이러한 어려움은
하느님과의 관계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결국 믿음은 공허한 외침이 되고
발만 성당에 다니는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믿기 위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인지
하느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표징을 원하는 것인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하느님께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로 보고 있는지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주위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보지 않는다면,
결국 고립되는 것은 나 자신임을
스스로 왕따 아닌 왕따가 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