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의 주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한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서도 죄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자비이며 그것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비는 사랑이 죄보다 클 때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자기의 사랑이 이웃의 죄보다 작기에 분노로 나타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랑이 인간의 죄보다 크기에 자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기에 이웃의 죄 때문에
얼룩이 지고 흔들리기에 미움의 불순물이 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크실 뿐 아니라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완전한 사랑이기에 인간의 죄에 의해 얼룩이 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늘 자비와 용서로 그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런 것인데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죄인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다가가느냐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렸다.
하느님 자비에 다가가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 자비에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는 얘깁니다.
달리 얘기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하느님 자비에 다가가 용서받고 은총을 입는 죄인이 있고,
하느님 자비가 못마땅하여 하느님 은총 밖에서 투덜거리는 투덜이 죄인이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십니다.
하느님께는 다 사람일 뿐이고 다 죄인일 뿐인데
하느님의 빛에 다가가 빛을 쬐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빛이 싫다고 피하거나 필요 없다는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달리 얘기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해서 찾아가 용서를 받는 죄인이 있고,
자기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을 찾지도 않고 이웃에게 자비로운 하느님을 못마땅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을 뿐이고
주님은 복음에서 내내 이것을 꼬집으십니다.
세리나 창녀처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에
하느님께 다가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는 데 비해
바리사이처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에
자기에게는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 없다고 하느님 자비를 걷어차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웃에게 자비로운 하느님께는 불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동생과 형이 그 좋은 예인데
우리는 오늘 동생처럼 하느님 자비에로 다가가기로 결심할 뿐 아니라
하느님 자비를 걷어차고 이웃에 자비로운 하느님이 못 마땅해
노상 투덜거리는 투덜이가 내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