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씨앗과 관련한 복음을 듣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과 분명 연관이 있기 때문이고,
라우렌시오 성인이 씨앗과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죽어 진정 많은 열매를 맺은 분이시고,
그렇기에 교회는 그의 죽음을 기념이 아니라 축일로 기념합니다.
전례적으로 축일은 열두 사도만 축일로 기념하고 열두 사도 외에는
성녀 막달라 마리아와 스테파노뿐인데 라우렌시오도 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고 사도들의 사도이기 때문이고,
스테파노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라는 떼르뚤리아노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는 왜 축일 급으로 지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로마 교회의 씨앗이었기 때문인데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프루텐티우스 시인의 말대로 그의 영웅적인 순교와
그의 아름다운 행위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을 때 생선 석쇠 구이처럼 석쇠 위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한쪽이 다 익자 뒤집으라고 할 정도로 죽음의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인 순교의 모범을 보였으며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를 맡은 그에게
보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는 하여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보물로 여겨야 하는 모범을 남긴 그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죽음과 그의 사랑이 다 로마 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며 사랑으로 죽고, 사랑하며 죽는 삶을 오늘 묵상합니다.
왜냐면 우리도 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 죽습니다.
다 죽는데 죽음이 다릅니다.
사랑으로 죽는 죽음과 그냥 죽는 죽음이 다릅니다.
죽음만 그러겠습니까?
사랑하며 사는 삶과 그냥저냥 사는 삶이 다릅니다.
사실 그렇게 산 삶이 그렇게 죽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산 사람은 사랑으로 죽고 그냥저냥 산 사람은 그냥 죽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냥 죽겠습니까?
어차피 죽는데 사랑의 씨앗이 되어 열매 좀 맺고 죽을 수 없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