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그리된 것인지 모르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 ‘요구’라는 말이 공통으로 나옵니다.
오늘 이사야서에서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이 두 말씀을 엮으면 하느님께서 당신 요구 사항을 이미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요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인간이 이중의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요구를 들어야 할 우리가 오히려 하느님께 요구하는 무례함과
이미 표징을 주셨는데도 그걸 보지 못하고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이중의 죄가 실은 하나에서 나온 것입니다.
곧 교만이라는 하나의 죄에서 두 가지 죄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교만은 지독한 자기중심이고 자기밖에 없기에
다른 사람의 요구는 보이지 않고 자기 요구만 하게 되고,
같은 이유에서 이미 보여줘도 보지 못하는 맹시 현상이 있습니다.
맹시 현상이란 맹인처럼 보지 못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사실은 교만한 사람의 무시에서 맹시 현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하고 그래서 요구하는 것만 보기에
이미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을 보지 못하는 죄인인 우리,
그런 자기의 문제와 죄악을 보지 못하는 죄인인 우리에게
그래서 주님께서 다른 표징은 없고 요나의 표징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지만, 그것도 하느님에 의해, 억지로 그리고 겨우
회개하는 자가 요나이니 우리도 주님께서 교만을 깨주십사고 요구하지는 말고
요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