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학자가 주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 질문은 부자 청년이 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에게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런 다음 당신을 따르라는 해법을 주님께서 주셨는데
오늘 율법 학자에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해법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을
영원한 생명을 받는 해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이 두 해법에서의 공통적인 방점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야지만 하느님께 가고 거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을 버림-나눔-따름>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자기를 버림-십자가를 짐-따름>을 얘기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 힘들기에
그에게는 재산의 포기와 그것의 나눔을 더 강조하였다면
제자들에게는 재산의 포기보다 더 어려운 자신의 포기와
십자가 수용 곧 수난을 더 강조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율법 학자에게는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은 하지 않고 이웃 사랑만 말씀하시는 겁니까?
얘기해봤자 당신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기에 아예 그 얘기는 하지 않은 걸까요?
그보다는 율법 학자에게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그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웃 사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오늘 신명기 말씀처럼 하느님 계명을 늘 가까이 두고 살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법이 율법서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주님께서
물으셨을 때 그는 즉시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 계명은 가까이 있는데 이웃은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있었습니다.
이웃이란 본래 가까이 있는 사람인데 율법 학자에게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웃이 마음 안에서는 멀리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인 곧 이방인을 착한 모범으로 제시하시지만
그 전에 사랑이 없는 사제와 레위인 곧 유대인을 악한 모범으로 제시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웃도 이웃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반대로 사랑을 하면 원수도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서 멀어진 그래서 다가가지 않는 이웃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이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를 마치면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시는데
가라는 것은 다가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가까이 다가감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