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비교하시면서,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것과
적은 이들이 선택하는 것으로 구분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것이
항상 옳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선택에 더 비중을 두기도 합니다.
그 결과 소수의 선택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으며,
오히려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다수가 선택하는 넓은 문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고,
적은 사람이 선택하는 좁은 문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판단과 선택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길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도
좁은 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만 별난 사람 같고,
이상한 사람 같습니다.
왜 너만 거기에서 튀어야 하는지
사람들도 그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면서
소수의 선택은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보기도 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생명에 이른 길인지는
선택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선택이 지금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며,
그것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소위 말하는 지금 이 순간의 생사가
더 중요합니다.
다수가 선택하는 길은 무난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수'라는 것을
자세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수' 속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소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은데,
굳이 내가 선택한 의견이
소수의 의견이 되어서
미운털 박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목소리를 내기보다
다른 사람들 눈치를 먼저 보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기우는 방향을
선택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향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목소리 큰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붙어서
다수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경우 결국 공동체는
목소리 큰 소수의 사람들이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다수결의 결과와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길이
멸망으로 가지 않으려면,
모든 사람의 생각이 서로 충분히 공유되어야 합니다.
별난 사람의 의견도 충분히 지지 받고
동등한 하나의 생각으로 꺼내 놓을 수 있어야
우리는 더 좋은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앞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