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9)
사랑은 몸과 피를 주고받는 인격의 상호성 안에서 사랑이 된다.
내어주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연결로 소통이 가능할 때
비로소 서로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내어주는 몸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되며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열매를 맺는다.
음식을 먹고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을 먹고 살아갈 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존재론적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분출이 흘러 나에게 전해지기까지
하느님께서 인격적인 예수님 안에서 자기를 비워
인간과 동등하게 되었다는 것이 구원의 선물이 되었다. (필립 2,6-12)
그리스도께서 예수의 인간성 안에서 육화하셨다는 것은
신성과 인간성이 주고받음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음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때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으며
역동적으로 숨 쉬는 것이다.
서로가 존경하는 주고받음을 통해 공유하는 선으로 관계를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존재들이 된다.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매력에 끌려 ‘너무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그러한 관계에서 결코 물러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그런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죄’,이며 거절, 단절, 지옥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미래에 있을 처벌과 보상이라는 틀은
더는 쓸모없게 된다.
하느님은 개인적으로 소유하거나 이용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개인적 목적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기도와 희생, 재능과 재물을 바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이 주시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닮은 하느님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으로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목적에 따라 하느님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과 닮은 모습’(창세 1,26)으로 창조하셨다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존경하는 상호 관계, 서로가 감사하는 상호 관계,
서로가 내어주고, 살리기 위해 흘리는 피로 관계의 혁명을 이루어 낸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않으면 사랑을 알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을 알 수 없다.
나와 하느님과 만남은 나의 취약성과 상호성 안에서 경험한다.
가난과 겸손이 선으로 드러나는 상호성과 관계 안에서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취약함 때문에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