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할 인식의 얼굴들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위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동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 없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복음의 핵심을 살았던 사람들은 사랑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움의 희생자가 되었으나 사랑으로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이 우리를 비춘다.
성프란치스코와 성녀글라라는 신학의 바깥 변두리에서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핵심적으로 드러낸 사랑의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겸손하신 하느님을 일상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고 따르려고 했기에 표면적인 문제들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신앙에 대해 말하기 전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신앙의 길을 구체적 관계 안에서 길을 내면서 단순하게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바닥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의 동기들은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언제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을 맛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신학교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이었다. 특히 매력으로 끌어당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빠져 자연이라고 부르는 피조물을 우주를 관상하는 눈으로 보고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하느님의 창조가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관계에 물줄기를 대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에 모든 개체는 선하신 하느님의 돌보심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므로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생명 있는 모든 개체는 개별적으로 사랑받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나를 아는 지식의 출발점이 거기에 있다. 나 또한 다른 피조물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의 돌보심을 인간에게 맡겼는데 창조의 이야기를 지배하라는 말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피조물의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으로 지배의 땅을 넓히려는 인간의 탐욕이 생겨났다. 근본적인 이해를 수정해야 할 첫째 부분이 여기에 있다. 모든 피조물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개별성과 뿌리가 같은 기원을 가진 동등한 형제적 평등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인류가 겪는 고통이 재앙의 수준이 되었다. 돌보라는 관계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인간의 관계들은 이용의 대상일 뿐,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가로막는 단절의 존재가 되었다. 관계의 단절로 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나를 아는 지식이 하느님의 돌보심을 육화시키는 선의 도구적 존재로서 관계의 단절을 회복하는 성소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돌보는 일은 일상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외롭고 불안하고 두렵고 깨지고 안전하지 않다.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만을 우선시하기에 상처 입은 인간이 되었다. 상처 입은 인간을 치유하려면 상처 입은 의사가 필요했다. 그분이 육화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눈높이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고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 되셨다.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이 단절의 역사를 연결하는 관계로 안내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용서는 창조하는 일이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용서를 배워 관계 속에서 용서를 경험하도록 초대하신다. 용서하는 사랑에 자유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를 관계 안에서 육화시키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사용되는 자유만큼 위대한 사랑은 없다. 인간의 자유는 그것이 사랑을 위하여 사용될 때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죽으면서 살리시는 일이었다. 사랑은 스스로 내어 주기 위하여 죽는 몸이며 스스로 쏟는 피라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연약하고 무력하게 죽음으로써 증명하셨다. 그분의 죽음을 죗값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보다 응징하는 아버지로 이해하기 쉽다. 인간의 죄로 화가 나신 하느님을 달래기 위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죽게 해야만 화가 풀리시는 아버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증명하신 아버지는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자비였다. 자비라는 단어는 용서와 관련된 단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아버지께 부탁드렸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독점과 소유를 지배의 수단으로 여기며 사람의 자유를 짓밟고 죽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으면서 살리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당신의 생명을 내어드리면서 증명하셨다.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 앞에 서면 우리는 연약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사랑은 연약하고 무력하게 죽으면서 타인에게 생명을 내어 주는 몸으로 부활한다. 안전과 질서에 대한 욕구로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이라는 틀에 철저하게 묶여있는 이들은 상대방을 죽이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여긴다. 용서가 들어설 땅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은 은하계의 티끌에 불과한 인간이 만든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이라는 그러한 틀에 묶여 계실 분이 아니시다. 누가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자유는 사랑하는 자유다. 우주 안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전능은 사랑의 전능이다. 그분은 사랑이 아닌 힘으로 지배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게 한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랑이 보여주는 연약함과 무력함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우물이 곁에 있는데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처럼 낙원의 문밖에서 슬프고 외롭게 살고 있다. 문만 열면 낙원에서 살 수 있는데 낙원의 문 곁에서 죽어간다. 내가 만든 천사들에 의해 버려졌고 내가 만든 하느님에 의해 버려졌기 때문이다. 내가 중심이 되는 관점을 바꾸지 못하도록 스스로 만든 철옹성이 만든 결과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믿음에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이 두 번째로 수정해야 할 인식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는 인식의 혁명이 이루어져야만 모든 관계의 열쇠를 풀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의지보다 사랑받고 있음에서 출발해서 사랑하려는 의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의지는 응답하는 의지로써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한 의지다. 위로부터 받는 사랑이 없이 사랑하려는 의지는 나를 위한 것이지 하느님을 위하거나 타인을 위한 의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키고 바치려는 의지가 나만을 위한 복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희생을 즐기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가 흘러가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관계를 돌보지 않는 믿음은 허구요 일반적 종교적 행위로 끝나고 만다. 그 많은 기도와 돈과 희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복에 집중해 있기에 관계는 멀어지고 관계가 멀어지면 외롭고 고독해진다. 외롭고 고독할 때 무엇을 찾는가? 중독성 있는 대체들에 관심을 보이다가 파멸로 끝나고 마는 모습을 자주 본다.
변화된 사람들은 매우 단순하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 안에서 근원적으로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 준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안으로 흘러들어 변화된 사람은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지만 우상에 빠진 이들은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들을 자신의 안락을 위한 관계로 끌어와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느님의 선을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바보짓을 계속 저지르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신 일을 자신의 것처럼 만들고 타인의 선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 자랑하고 높이고 돋보이게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삶의 형태와 생명의 흐름이 복음의 핵심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믿음을 우상화한다. 우리는 자신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믿음으로 둔갑한 종교심 안에서 여전히 자신을 꼭대기에 올려놓고자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라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정당성의 근원이 복음이 아닌 인과응보와 상선벌악과 안전과 질서를 위한 명분에서 나온 정당성이기에 자유를 제한하고 죽이는 명분이 분명하다고 외친다. 어떤 교리보다 우선하는 것은 실천하는 자비다.
성프란치스코와 성 보나벤투라 요한 던스스코투스에 이르는 프란치스칸 삶의 신학은 행동하는 자비로 자유를 위한 길을 내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희망의 씨를 심어 원복을 위한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사랑이 출발이자 도착할 땅이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삼위일체의 상호 간에 내어 주는 사랑을 상실하게 되면서 우리는 돌보시는 하느님 사랑에 기뻐하기보다 벌이 두려워 불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왜냐하면 사랑을 죗값에 대한 해석으로 인식함으로써 사랑과 자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할 세 번째 인식은 죗값에 대한 이해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죽음의 원인이 죗값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스스로 내어 주는 사랑이라는 점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분출되는 선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관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의 힘이 전능한 힘이다. 전능한 사랑의 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죽음으로써 살린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내어놓기보다 벌 받지 않기 위하여 내놓는 자유는 할 수 없이,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라.”(시 34,9)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하심은 발산하는 선으로써 우리를 비춘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동들로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고 공유하는 선으로 관계를 넓히면서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으로 옮겨 놓는다. 말씀의 통치에 나의 자유를 내어 맡김으로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내 안에 머무시는 영의 활동을 통해 존재와 생명을 공유하고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의 창으로 창조의 손길을 바라보며 우리를 품으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회개 여정이기 때문이다.
첫째 모든 피조물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둘째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는 인식의 혁명이 이루어져야만 모든 관계의 열쇠를 풀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죽음의 원인이 죗값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스스로 내어 주는 사랑이다. 새로 태어나는 삶이라면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