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독서와 복음은 신비 체험을 한 아브라함과 제자들 얘기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미리 체험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왜 미리 체험하게 하실까요?
죽으면 어련히 보게 될 하늘나라이고 그때 보면 될 것을 왜 미리 보게 하실까요?
오늘 베드로 말처럼 땅에 내려갈 생각은 않고 계속 거기 머물라는 뜻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님은 이 산에서 내려오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신비를 보여주신 뜻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슴에 안고 수난의 현장으로 가라는 뜻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일 겁니다.
신비 체험이 없고 그래서 그 신비를 가슴에 안고 살지 않으면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갈 것입니다.
신비를 가슴에 안아야 등에 십자가를 질 수 있는데
신비를 가슴에 안지 않으면 십자기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십자가의 원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자기의 배를 하느님으로 여기는 사람인데
여기서 배란 막말로 하면 200주년 성서의 번역처럼 배때기이고,
위를 채우거나 욕심을 채울 때의 그 배입니다.
우리는 위를 가득 채웠을 때 배불리 먹었다고 하고,
욕심을 가득 채웠을 때도 배를 채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식욕을 비롯하여 모든 욕망을 신으로 섬긴다는 뜻이며
우리가 사순 시기에 하느님을 새로이 모시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과 반대로
포식을 하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을 인생 즐거움으로 삼는 것과 같은 뜻일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라는 시편을 모를 겁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수치'란 '배'처럼 성서학적으로는 다른 뜻 곧 할례를 자랑삼음을 뜻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영성적으로 다르게 이해하면 십자가 지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김으로써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코린토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라고 얘기했지요.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가 자주 얘기하는 '땅에서 하늘을 사는 것'과 반대입니다.
하늘은 쳐다보지 않고 그저 땅에 돈이 떨어져있나 보듯 그저 세상만 보고 삽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과 연결시킬 때 십자가의 원수는 정반대의 두 원수입니다.
하나는 땅만 보는 원수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만 보는 원수입니다.
땅만 보는 원수는 오늘 필립비서가 얘기하는 세속적인 사람이고,
하늘만 보는 원수는 오늘 베드로처럼 현실 도피적인 하늘바라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사는 사람은
앞서 얘기했듯이 하늘을 가슴에 안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사는 하늘 시민인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이 세상을 살면서도 주님 안에 또는 주님 앞에 굳건히 서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