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17,28)
우리는 아버지의 품보다 어머니의 품에 의해 사랑을 느끼면서 성장해왔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품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을 둘 다 갖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지는 아버지에게서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부성과 모성의 조화로운 이미지가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으나
모성적인 이미지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생산적이고 합리적이며 비판적 사고와 효율성이라는
남성적 우월성이 능력으로 표현되는 문화에 길들어온 나는
어머니로부터 느꼈던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섬세하고 여성적 직관과 더불어 성장해왔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어머니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 실존이
내 안에서 통합되기를 추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갈망은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 안에서 보여준 삶의 실제를
내 안에서도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17,28)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숨을 쉰다는 것은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의 길을 찾고 발견하고 느끼도록 하는 가르침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 배움으로써
그분의 육화를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는 변화의 여정에 초대되었음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거룩한 신비가
자신과 더불어 사는 관계 속으로 파고들게 되면 물질과 영이 통합되고,
여성성과 남성성이 통합되며, 영혼과 몸이 하나 되는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치 안에서 인간은 사랑이 주는 황홀한 신비를 기쁨으로 드러내며
온몸에서 발산하는 이 기쁨이 빛이 되어 서로를 비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슴보다는 정신을, 직관보다는 합리성을, 물질보다 영을,
몸보다 영혼을 여성적인 것보다 남성적인 것을 선호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삶 안에서 통합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내 안에서도 통합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평생을 거처 추구한
가난과 겸손이 주는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연약함의 영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모든 것을 통제하며 왜곡시키고 힘을 쓰던 시기에
자신들의 보호를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무방비 상태를 선택하여
권력과 돈에 의존하는 통제를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의 특권을 교황에게 요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이 우리를 통제하고 왜곡시키는 현실에서
그것들의 통제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삶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여건에서 나의 자유와 의지를 하느님의 손에 내어 맡긴다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 안에서
내가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지각과 인식은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지나가는 것과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과 나와 피조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오고
신앙이 아닌 종교적 행위만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합의 원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창조의 에너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 창조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 생명의 에너지였습니다.
모든 것을 쪼개고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생명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혼돈의 세상을 만듭니다.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서 자신만을 챙기려는 독점과 소유가
인간의 탐욕과 함께 관계를 단절시키는 끔찍한 일이 생겨납니다.
몸이 없는 영혼, 물질이 없는 영성, 여자가 없는 남성, 직관이 없는 합리성,
어둠이 없는 빛, 죽음이 없는 부활,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틀입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만든 철학이며
영지주의가 만든 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틀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말씀과 행동하는 자비로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어떠한 수단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원초적 행복을 낙원에 두셨듯이 원죄의 그늘 밑에 있는 모든 생명에게
해방될 희망을 두셨습니다.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며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 8,21-22)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 안에서 발견한 통합의 원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줄 날을
기다리며 창조 때 받은 생명의 에너지가 서로 연결된 삶 안에서 꽃피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