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애기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가까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3 주일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의 독서들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첫 번째로 나눔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바오로 사도도 같은 말을 합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이 말씀들은 우리를 조금은 의아하게 만듭니다.
아니 어쩌면 많이 당황스럽게도 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데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라고 하니 말입니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오시는데 우리가 오시는 주님을 보지 않고
다른 데 한눈파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고
지금 같이 사는 인간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정말 문제일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이 사실은 바로 가까이 오시는 주님이라는 뜻이겠지요.
이는 우양의 비유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는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뒤집으면 “지금 여기”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주님과 아직 한참 멀리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또 자캐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자캐오의 집에 들르신 주님께 자캐오는 가진 것을 나누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집에 구원이 왔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며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그래서 구원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구원이 오니
나눔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기쁘고 즐거운 사람은 주님을 맞이한 사람이고,
사랑으로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사람은 그 반대겠지요.
주님을 아직 영접치 않는 사람이고,
사랑으로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지 않는 사람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은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고,
거기에서는 가진 것을 잃음, 손실 외에는 구원도 충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도 충만도 없고,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곳에
사랑의 나눔 대신 착취와 억압이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은커녕 상실과 상실의 분노만이 있는 사람은
그 상실과 분노를 메우려고 욕심껏 남의 것을 착취하고 억압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그분은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알곡인가, 쭉정이인가?
나눌 줄 몰라 아무런 기쁨도 즐거움도 없는 쭉정이일 뿐인가,
사랑의 나눔으로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알곡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