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세례자 요한은 다시 온 엘리아입니다.
엘리야 시대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시 온 엘리야, 곧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당대 사람들은 몰라보고
당대 사람들이 제 멋대로 다뤄 죽고 난 뒤에야 후대 사람이 알아봅니다.
그러면 왜 당대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후대에야 알아볼까요?
그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요즘 선거판에서는 <내가 하면 검증, 남이 하면 Negative 공세>,
이런 현상과 깊이, 아니 정확히 관련이 있지요.
예언자는 똑같은 예언, 곧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나에게 하면 예언이 아니고 트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하면 트집이 아니고 예언이 되는 것이지요.
누구든 당장은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는 아이가 주사를 놓는 의사를 나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슬픈 운명입니다.
나중에는 높이 칭송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는 죽일 놈입니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미래의 칭송을 생각하며 현재의 냉대와 질시를 감수하는 것은
아무리 예언자의 운명일지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은 그러므로 용기 있는 사람 그 이상의
이런 운명을 주신 하느님을 온 몸으로 맞이하는 존잽니다.
살을 에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듯
그 아픈 짓을 독하게 해내는 존재이고
그 대가로 살해를 당하는 존잽니다.
다시 말해 나의 잘못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사람,
나의 아픈 곳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후벼 파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이 나의 엘리야이고 나의 요한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엘리야와 나의 요한은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지금 그들을 하느님께서 바로 내게 보내신
나의 엘리야와 나의 요한으로 알아보고 있는가요?
세례자 요한은 아니지요, 저 또한 말과 행위 일치 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