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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33주 목요일- 눈물은 동감, 눈물은 안타까움

by 당쇠 posted Nov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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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울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한 울음과 남을 위한 울음이라고 할까요?

자신을 위해 우는 것이란
상실감이나 원통함 때문에 우는 것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정든 고향을 떠날 때,
또는 오늘 수능시험을 보는 아이들처럼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을 잘 못 봐 너무 억울하고 원통할 때
억누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면 그 감정이 울음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경우 울음은 억눌린 감정의 토로입니다.

남을 위한 울음이란 동감의 울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너무 큰 슬픔이나 고통에 동감할 때,
그러나 동감할 뿐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지극할 때
그것이 억누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면 울음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경우 울음은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의 눈물은 인간의 크나큰 슬픔에 동감하고
그러나 그 슬픔의 상황을 면케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눈물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에 입성할 터인데 그 예루살렘을 보시며
평화의 도시라는 뜻과는 달리 평화와는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곧 파멸될 것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에게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것이 감추어져 있습니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는 보편적입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고
계층을 초월하고
빈부를 초월하고
남녀를 초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있는 곳에는
모든 담이 허물어지고 공평과 평화로운 공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없습니다.
대신 모든 눈을 멀게 하는 인간의 탐욕과 억압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일 성전정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인간의 이 탐욕과 억압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이로 인해 기득권자들에 의해 죽게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물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눈물과 함께
이 인간의 탐욕과 억압에 대해서는 당신도 어쩔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시는 안타까움의 눈물도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이 눈물이
우리 안에서 탐욕을 정화하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샘물로 솟아나기를 이 아침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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