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축일, 오늘의 복음은 일흔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마태오 복음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이 구절을 뺍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주님의 말씀일까요?
같은 내용의 마르코 복음에도 이 구절이 없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놓고 볼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쓴 마태오 복음 사가가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이렇게 썼거나,
마태오 복음의 맨 나중을 보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우선은 선택받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런 다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즉 순서적인 복음 선포의 뜻으로 이렇게 쓴 것일 것입니다.
아무튼 루카복음은 이 구절을 뺍니다.
그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바오로와 함께 이방인의 사도였고,
그래서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바오로와 루카가 새로운 곳으로 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영토가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도 확장되었다고 말입니다.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대로인 하느님의 사랑도 사람에 따라 커지고 작아질 수 있지요.
인간은 무엇이든 자기 그릇만큼 담을 수 있는데
하느님 사랑도 자기 그릇만큼 담고서는 그 정도로 크다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이 내 그릇만할 리 없지요.
우리 인간의 모든 그릇을 채우고도 남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고,
한 개의 달이 천 개의 호수에 비치듯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랑도 같은 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수, 민족들의 수만큼 크고
사람들의 수, 민족들의 수만큼 다양합니다.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사람은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가 가고
모든 다름을 껴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래서 사랑에서 배제되기도 하는데
다름은 틀림도 아니고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달라도 사랑하고
달라도 不二(둘이 아님)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마태오 복음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이 구절을 뺍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주님의 말씀일까요?
같은 내용의 마르코 복음에도 이 구절이 없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놓고 볼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쓴 마태오 복음 사가가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이렇게 썼거나,
마태오 복음의 맨 나중을 보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우선은 선택받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런 다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즉 순서적인 복음 선포의 뜻으로 이렇게 쓴 것일 것입니다.
아무튼 루카복음은 이 구절을 뺍니다.
그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바오로와 함께 이방인의 사도였고,
그래서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바오로와 루카가 새로운 곳으로 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영토가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도 확장되었다고 말입니다.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대로인 하느님의 사랑도 사람에 따라 커지고 작아질 수 있지요.
인간은 무엇이든 자기 그릇만큼 담을 수 있는데
하느님 사랑도 자기 그릇만큼 담고서는 그 정도로 크다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이 내 그릇만할 리 없지요.
우리 인간의 모든 그릇을 채우고도 남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고,
한 개의 달이 천 개의 호수에 비치듯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랑도 같은 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수, 민족들의 수만큼 크고
사람들의 수, 민족들의 수만큼 다양합니다.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사람은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가 가고
모든 다름을 껴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래서 사랑에서 배제되기도 하는데
다름은 틀림도 아니고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달라도 사랑하고
달라도 不二(둘이 아님)입니다.
그것이 저의 문제가 되어 제 앞에 부딪힐 때면
다름을 수용하기가 점점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인간사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한 해 두 해 세월이 갈수록
왜 이렇게 마음이 점점 굳어져 가는걸까요..
강론을 묵상하며
주님의 마음, 주님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신부님! 강론과 강론 제목이 너무 아름다워요..^^
No , 가 없고
오직 Yes , 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