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는 사랑 받는 자 안에서 기뻐한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인간성 안에서 삶의 방식을 배워왔다.
거기서 내가 발견한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람은 새로운 생각이 삶을 바꾸게 하기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생각을 바꾸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이었다.
가난과 겸손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치스코는
예수께서 가난하고 겸손하셨기 때문이었다.
가난과 겸손은 생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나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은 이론이 아니었다.
모든 상처와 동기들이 숨어있는 위장된 장소인 무의식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정직한 가난과 겸손의 실제가 변화를 이루도록 돕는다는 사실이었다.
행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진리가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 행하셨고, 프란치스코께서 행하셨다면 나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원의 형제들 안에서, 내 주변의 여러 관계 안에서,
가능한 일부터 시작하여 정직한 내면으로부터 가난하고 겸손하게 실천하려는 것이
내 생각을 바꾸도록 이끌어 주었고 잃어버린 본질적 시야를 되찾도록 제공해주었다.
예수님의 인간성과 프란치스코의 인간성 안에서 보고 배우는 진리,
인간적 실제의 구체적 현장에서 느끼는 감성,
인간적 한계를 두려움 없이 정직하게 표현하는 믿음과 사랑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의 삶의 방식이 믿음으로 표현되는 순수한 관계,
누구를 비난할 필요도 없고, 나를 변호할 필요도 없는 삶의 실제,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나도 하느님을 바라보는 내 믿음의 현장에서는 주인공이 바뀐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인공이 되도록 허락해 주신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조금이라도 행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존재를 영광스럽게 해주신다.
내 의지를 그분의 통치에 맡기고 생명을 의탁할 때 그분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의 삶을 상대에게 주었을 때,
나 또한 그 사람의 삶을 즐길 수 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 받는 자 안에서 기뻐하는 관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의 관계가 그것이라고 믿는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셨다.
초대받은 사람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여기서 산다.
대림절을 앞두고 듣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렇게 살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 (2고린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