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자신만 자유롭게 하려는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관계의 지옥이다.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더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은
실천적 믿음과 행동하는 자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의 지식은 성장을 위한 변화로 나아갈 수가 없다.
진리는 믿음 안에서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선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고 자신과 타인을 진리로 인도할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거나 하느님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기에 아쉬울 때만 찾는다.
믿음이 없는 지식은 자신의 실리적인 목적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여 관계를 망친다.
복음적 계시는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는가에 따라 열매를 맺는다.
주님을 모신다는 것은, 내가 나를 가르치지 않고 다른 이가 나의 스승이 되고,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으며 다른 이가 나의 주인이 되고 인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화의 도구로 산다는 것은, 절대적 타자이신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믿음과
초월자를 만나는 신앙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은,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내 자유와 내 의지를 맡겨드린다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에 대한 중요성과 자율성을 포기하고 그분과의 연합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분과 연결된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창조 때부터 우리를 통하여 창조를 계속해 오셨다.
그분은 나를 존중해주시고 돌보아주셨지만 나를 무시하거나
당신이 좋을 대로 하시지 않고 나의 협력을 구하셨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실 공간과 여백이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마음 안에 공간과 여백을 만드는 것은 성전을 허무는 일과 같다.
오늘 복음은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이다.
사람들이 신을 섬기기 위하여 만든 돌로 만든 성전의 돌들이
하나도 제 자리에 놓여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만든 성전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는 관계의 돌들로 쌓은 성전이다.
관계의 돌들이 제 자리에 있도록 하려면 내가 쌓아놓은 성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관계의 돌들을 하나씩 올려놓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자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며 합리화할 것이다.
고난과 좌절, 치욕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라는 존재가 모든 것을 장악하면서 만든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연결을 위한 필수과정이다.
신앙은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함으로써
환상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로 흘러가게 하는 일이다.
그것을 가로막거나 흘러가지 못하도록 중단시키는 것,
그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죄’의 구체적 현실이다.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은 믿음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이 있다.
경쟁할 필요도 없고, 자랑할 일도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자신을 높일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이 나의 소유가 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친 어떤 대가도 아니며, 성과나 결과물도 아니다.
그분을 내가 소유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애쓸 뿐이다.
관계의 회복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관계가 깨졌거나 허물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오면서
탐욕과 독점과 소유를 우선으로 찾아왔으며 꼭대기에서 살아왔다.
나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왔다는 말이다.
나만을 위한 삶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관계의 돌로 하느님의 성전을 재건하려면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동하는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에게로 흘러가도록 응답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은하계의 티끌인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회개하는 삶으로 초대된 축복이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유일한 돌이 되어
내 위에 너를 올려놓는 관계의 혁명이 거기에 있다.
가난과 겸손과 온유한 마음은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허물어진 성전은 나를 허물 때 복구의 희망이 있다.
그렇게 한다 해도 나는 나로 남아 있으며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고난과 죽음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 길로 안내해 주셨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 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