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그 지식이 자라기를 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충만하도록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형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충만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욕심부릴 것이고
불만을 달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끝마다 욕심을 비우라고 서로 얘기합니다.
그만큼 욕심 비우기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시이고,
비웠다가도 다시 욕심을 부리고 채우기 때문이지요.
충만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란 결핍을 채우려는 내부 기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만복 곧 배가 부를 때는 식욕이 전혀 없다가
배가 고프면 식욕이 생기고 어떻게든 빈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든 다른 무엇의 결핍이든 결핍이 있을 때
욕심과 함께 생기는 것이 불만이고, 이 불만은 그 욕심을
채우든 다른 것으로 대리 만족하든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지요.
가장 흔한 대리 만족이 주전부리나 게임과 도박이나 쇼핑인데
그러나 이런 대리 만족으로는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이제와 영원히 가장 완전한 불만 해결은 하느님으로 충만하고,
하느님 은총으로 충만할 때 뿐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어제는 우리 수도원에 살다가 나간 형제와 늦게까지 한 잔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산 것이 아닌데도 자주 수도원 사는 꿈을 꾼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수도원 생활을 그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이 많아서
수도원 떠났다고 후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만족하며 살 것을 그때는 욕심이 많아서 만족치 못하였고
그래서 수도원을 떠났다는 후회인데
그런데 그때는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았다는 걸까요?
말하는 뉘앙스로 보면 형제들과 수도원에 대한 불만이었고
그것은 더 완전한 형제들과 수도원이기를 바란 욕심 때문이었다는 건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형제의 욕심이 실은 형제들과 수도원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소유하기까진 그칠 수 없는 욕심이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그 형제의 종교적 편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방황을 한 것인데 제가 보기에 그 형제는
아오스딩 성인이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방황했던 것처럼
그렇게 방황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형제 뿐 아니라 우리도 하느님으로 충만하기까지는
이런 저런 것으로 대리 만족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못하고 또 다른 만족들을 찾아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만족의 방향을 틀어야 함을,
세상으로 향했던 만족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틀어야 함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다.^♡^
(늦둥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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