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적 변화로 나아가게 하는 삶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의지보다
하느님으로부터 그때그때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과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 시작하지 않았고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이고, 바쳐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배웠다.
기도와 희생과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못할 것처럼 배웠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복음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삶보다
사목자들의 교리와 강론, 선배 교우들의 전통과 삶에 의존해 왔다.
특히 요즘에는 가톨릭교회의 근본주의가 성모님의 메시지와 더불어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모범보다 기도에 따른 은사들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보편적 구원보다 개인의 구원과 개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면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자신이 바치는 기도의 양과 희생의 정도에 따라 하느님이 반응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매우 인색하고 쩨쩨한 분으로 만들었다.
바치지 않으면 안 주시고, 조금 바치면 조금 주며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시는 하느님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아버지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하느님이다.
그 결과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의 신앙은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신앙이지 무엇인가를 바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주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희생,
업적과 공로와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삶의 여백과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관계적 선보다 혼자만의 구원에만 힘쓰다 보면 영적 불구가 된다.
교회에는 영적인 부상자들이 많다.
기도할 시간은 있어도 가까운 가족과 이웃을 돌보거나 보살필 시간은 없으며
본당에서 봉사할 시간은 있어도 자신의 삶을 가꾸고 돌아볼 기회는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만 알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정보는 사람이 만들어낸 하느님이다.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쏟아붓는 이들은
하느님을 종교심이라는 틀에 가두었다.
종교심은 믿음도 신앙도 아니다. 급할 때 찾는 어떤 대상일 뿐이다.
예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상선벌악과 인과응보의 틀에 갇혀계실 수가 없다.
응답하는 신앙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응답은 먼저 자신 안에서부터 내적 변화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에페5,29)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노력과
위생적으로 깨끗하고 정갈하고 단정한 의복과 몸가짐,
깔끔하게 청소하고 잘 정돈된 실내, 잘 닦인 창,
여백이 있는 공간배치, 편리하면서도 꼭 필요한 기구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조촐한 식탁과 정성껏 만든 음식,
누군가가 찾아오면 최상으로 환대하려고 준비된 다과,
깨끗한 주변 환경, 시간적 여유와 공간적 여유와 쉼 등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자신의 삶이 빛나면 아버지의 이름을 빛낼 수가 있다.
그 누구도 이런 것들이 응답하는 신앙의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먼저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관계의 변화로 나아갈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마태 9.13)
타인을 지배하기 위하여 과도하게 소모하는 에너지는 낭비하는 에너지다.
신앙은 경쟁으로 쟁취하는 삶이 아니다.
기도의 양으로 경쟁하고, 봉사의 양으로 경쟁하고,
희생의 양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싸워야 할 원수들이 많이 생긴다.
사랑은 동등한 관계에서 시작되고 성장하며 확장되는 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하여 산다.
예수께서 주신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기도와 미사, 전례에 참석하고 많은 양의 묵주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행동하는 자비다.
이렇듯 응답하는 신앙은 자신의 변화로 시작하여 관계의 변화로 나아간다.
하느님과 연결되고 이웃과 연결되고 피조물과의 연결이 하느님 나라의 초석들이다.
연결이 없는 감옥에서 혼자만 살아가는 사람은 외롭고 공허하고 어둡다.
응답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이 얼마나 복된가?
응답하는 신앙으로 내 삶이 빛나면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를 지금 여기로 옮기며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하여 관계적 선으로 꽃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