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으로 느끼는 낙원의 기쁨
느낌은 몸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걱정거리와 스트레스를 너무나 많이 받으면 몸을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억압된 상처와 분노 슬픔과 우울한 마음으로 시달리게 되면
식욕도 잃어버리고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밖으로 표출한다.
기쁨은 사람을 불러들이지만,
분노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외톨이가 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낙원의 기쁨은 언제나 구체적 지금이며 오감으로 느낀다.
오감으로 느끼는 낙원의 기쁨은 몸에도 좋다.
느낌이 없는 추상적 이론은 이상일 뿐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 사람의 마음과 몸의 자세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의 신앙과 연결된 사람들은 상상이 만들어낸 허위 사실들로
자발적 고행을 가르치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개인의 삶에 적은 고난과 더 많은 기쁨으로 우리를 안내하신다.
자신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타인의 자유를 넓히고
타인이 자유를 누리는 기쁨을 보는 것은 자신에게 더 큰 기쁨을 가져가 준다.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는 편하고 가벼운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염려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확실히 더 큰 이득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듣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지만,
그로 인하여 무엇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기쁨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19,27-29, 마르코 10,28-30, 루가 18,29-30)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의 법칙이란
상대방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법칙이기에
꼭대기에 올라앉아 지배의 칼을 휘두르며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세상의 가르침 때문인지,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인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일이다.
결론은 뻔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따라 고통받은 적이 한 번도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불행이 세상의 가르침과 가치 기준에 따라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세상 가르침에 따르면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여전히 얻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얻었다 해도 계속해서 또 다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제일 조건 중의 하나는
하느님과 나, 너와 나, 자연과 나와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는 삶이다.
비록 나약한 인간성 때문에, 넘어지고 유혹에 빠져도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맑은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과 햇살 아래 펼쳐진 평원, 숲과 나무와 바위,
계곡을 흐르는 물, 온갖 새들의 노래,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의 찬란한 꽃들,
꽃을 찾는 벌과 나비와 곤충들, 저녁노을에 비친 바다, 산들거리는 감미로운 바람,
낙원은 그렇게 우리 곁에 있다.
성프란치스코는 자연의 모든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로 불렀다.
같은 기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낙원은 내가 사라진 곳에서 발견되는 현재의 느낌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거기에 낙원의 기쁨이 있다.
아름다움을 보고, 음악을 듣고, 혀로 느끼는 깊은 맛, 향기를 맡고
손으로 만지는 부드럽고 따스한 감각으로 낙원을 느끼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 끝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너로부터 시작되어 우리로 끝난다.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낙원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 있다.
보편적 관계 속에서 누리는 낙원에서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누구도 당신 품에서 멀리 있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의지가 나를 통제하도록 내어놓는 거기에 자유가 있고
너를 통제하는 거기에 지옥이라 불리는 단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