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과 우리 믿음의 성찰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먼저 화해하고 제물을 바쳐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
간음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따르려고 하는가?
신앙이 아닌 것을 신앙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눈앞의 복을 달라고 많은 양의 기도문을 외우거나, 얼마의 재물을 교무금과 주일헌금으로 바치고, 교회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하느님과 거래를 하고 흥정하듯이 한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지켜야 하는 규정을 지켰기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너를 제외한 관계에서는 실천할 수 없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제물을 드리기 전에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애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노력은 하느님께 미루고, 혼자서만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 그분이 주시는 복을 독차지하고 싶어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큰 은총을 받거나,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 보이면, 매우 강한 질투심을 느끼며 상대방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면서 헐뜯는 말과 뒷담화를 통해 자기를 지지해줄 사람을 만들기에 분주하다. 이들에게 있어 복음의 말씀들은 필수적으로 실천할 내용이라기보다 남들에게 전해줄 말마디만을 배워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왜곡된 진리를 진리로 착각하는 것은,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고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즉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려고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속적으로 찾는 복이 아닌가?
이러한 복을 달라고 그렇게 바치고 지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복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로 주신 선물이지 바쳐서 얻어 낸 복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어떤 것 때문에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가 없어도
할 수 없이 거기에 상응하는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개인 생활의 행복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이 찾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아니며, 하느님과 교회와 너는 이용 가치가 있을 때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인과응보와 처벌과 보상이라는 틀에 묶여 살면서 늘 물리쳐야 할 원수들이 많고, 해야 할 숙제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모든 노력은 늘 헛된 것으로 남는다. 참되지 않은 것을 참된 것으로 확신하려는 희망을 신앙으로 부르면서 늘 그 이상의 것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온갖 정성과 마음으로는 개인의 행복을 찾으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편이 낫다고 믿고 싶은 이상한 욕망을 갖고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참된 신앙, 올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인생관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변화를 싫어하고 나를 포기하는 죽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좋다고 여기면서 행동하기엔 불가능하다고 쉽게 그만둔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내려놓고 내려가고, 허용하고 놓아주어야 한다.
자만심과 망상, 거짓 욕망, 도취 된 우월성을 내려놓기 위해 실제로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화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신앙의 유일한 표시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행동하는 자비다. 말뿐인 신앙, 행위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믿기 위해서는 이론으로 충분치 않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개개인의 삶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로 선포된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목표로 구해야 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에 명확하게 들어있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하여 육화되는 현장이며,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다.
하느님의 통치에 자신의 의지를 내어 맡기는 데 따르는 고난은 자기를 위한 깨달음과 타자들을 위한 자비심의 대가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너로부터 주변의 관계들이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관계의 혁명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느님과 가까이 머무는 사람은 그렇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너로부터 모든 피조물로 관계를 넓힌다.
결정적 죽음이 아닌 일상적인 자기 죽음을 신뢰할 때마다 우리 믿음은 깊은 차원으로 인도되고, 관계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현재로 경험된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세포에 이르기까지
재조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의지가 없다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는 빛을 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