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저지르는
폭력과 망상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폭력과 증오에 물어뜯긴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이 비추고 계신 십자가의 거울 속에서
나 자신도 어떻게 폭력과 증오에 물어뜯겼는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십자가에서
고난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너그럽게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우리를 향해 당신의 두 팔을 벌리시고
아픔을 견디는 사랑만이
아픔을 겪는 이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당신은 속죄양을 만들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수많은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당신의 전능한 힘을 포기하신 당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매일 수많은 결단과 항복을 통해 보여주신 길이 십자기의 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과 운명을 공유하는 소명이기에 당신이 허락하시는 것을 우리도 허락하고
당신이 고난받으시는 것을 우리도 조금이라도 고난을 받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아무도 헤치는 일이 없이
저마다 창조 때 받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화해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기로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혼자서 만들어 낸 천국은 결코 오래가는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무능력으로부터 배워야 했고 더욱 다듬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능력마저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말에서 떨어진 바오로처럼 사고의 틀 전체가 부서지고 깨어졌습니다.
자신이 무너진 그곳에서 나를 일으켜주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이셨습니다.
힘을 지니신 분께서 무능과 연약함으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신 십자가의 길,
그 길이 아니었다면 나는 자신이 만든 감옥 문을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본성이 비폭력이었기에 십자가에 달리실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말로 해도 안 되고 폭력을 쓸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선택으로써 지는 십자가,
견딜 수밖에 없을 때 견디는 것, 그것이 사랑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처벌이 아니라
사랑과 포용을 통해서 그리고 용서를 통해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견딤이 크면 사랑도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는 나에게 와서 쉬어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부터 배우는 사랑은 그렇게 나에게 전해졌습니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하는 삶은
자신이 바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문제라고 느끼지 않을 때,
하느님까지도 속죄양을 만들고 마침내 당신을 십자가 위에서 죽임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시키기보다
하느님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배척을 기꺼이 겪으심으로써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결국 당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시는 당신의 시선이 마주치는 거기,
나의 문제들을 바라봅니다.
더는 속죄양을 만들지 않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도움을 청합니다.
2021, 2, 27
사순 제 2주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