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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꼭 해봐야 하는 질문 ( 2/2페이지)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Feb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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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페이지)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희생을 요구하신다는 생각 자체를 바꿨다.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마태오 9,13)

희생이라는 말에 담긴 숨은 의도가 보복적 정의라는 틀 속에 나를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개라는 말도 관계를 회복하려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행하고 극기하는 희생이라는 말로 들리도록 함으로써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종교는

예수께서 실천하시고 선포하셨던 복음과 하느님 나라와는 달리

보상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사후에 가게 되는 천국을 연상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되면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는 빼앗기고 만다.

 

내가 반기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재물을 바치기 전에 내 마음을 알아다오. (호세 6,6)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낮추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내어주고

냉혹한 정의로 통제하는 하느님으로 맞바꾸게 된다.

그렇게 되면 폭력이 정당화된다.

정당화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그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폭력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으며 정당화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되었는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관계를 회복하는 정의다.

처벌이 아니라 화해와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다.

화해와 관계의 회복을 위해 일하다 보면 고난이 발생한다.

인과응보와 보복적 정의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행동하는 자비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한 구체적인 증거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나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피조물과 나 사이에

관계의 회복을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원하는 고난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예수께서 겪으신 고난은 우리 죄에 대한 값을 치르신 것이 아니고

타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다.

 

그분의 치유 이야기들은 하느님은 처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치유하시는 하느님, 자비롭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내어주고 죽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속죄론(죗값)의 이론들은 호소력을 잃는다.

속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깊이 있는 영적 여정을 포기하게 만들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유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죗값을 따지는 인과응보, 보복적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정의다.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속죄론을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 살아왔다.

 

예수께서는 잘못한 인간을 위해 당신은 죽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마지못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선택하신 사랑의 계시였다.” (둔스 스코투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은

너무나 많은 죄악이 희생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도록

방관하였는지 성찰해야 한다.

 

내 인생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께서 실천하셨던 자비는

회복하는 정의라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루가15,11-23)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신다.

그분은 아들에게 계산서를 요구하거나 어떤 죄를 지었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대가를 요구하는 정의는 처벌적 정의다.

용서하는 사랑은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대가를 요구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대가 없이 거저 주는 자비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생을 원하지 않으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재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8)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는 자비,

강도당한 이웃을 보살펴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연민,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이렇게 회복하는 정의였다.

 

희생을 요구하고 조종하고 통치하려는 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폭력적인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다.

인간에게 희생과 고난을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다.

하느님은 고난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고난의 신비

예수께서는 고난의 신비가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셨으며

우리도 변화되어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셨다.

그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모순들을 붙잡고 자신 안에서 모순들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구원자들이다.

자신의 죄를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변화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현실의 십자가 형태를 받아들이도록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받아들이도록 초대받는 사람들이다.

의무나 요구사항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는

이 변화야말로 십자가를 통해 발견되는 보물이다.

 

예수께서는 고난받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신다.

고난을 받고서 해방된 사람들,

더욱 강해지고 현명해진 사람들,

더욱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있게 바라봄으로써

아버지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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