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긴목의 성모님(1532 –1540)
작 가 :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ono : 1503-1540)
크 기 : 목판 유채 216X132 cm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가톨릭 성화의 특징은 표현의 다양성에 있는데, 그중에 큰 획을 그은 것이 바로 매너리즘(Manerism)이라는 화풍이었다.
전통적인 매너리즘의 미술사적 시대 구분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어지는 대략 1530년에서 1590년까지의 과도기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미술 양식이다. 이것은 실물 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던 것을 이상으로 여기던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너리즘은 전통적인 미의식의 왜곡과 함께 과거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의식을 표현하며 정신적인 결렬함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즉 성화에서도 틀에 짜인 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과거에 상상도 못할 자유분방한 표현의 동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너리즘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과거의 전통에서 이탈만이 아니라 과거에 표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예술적 경향이 찬란했던 파르마 공국에서 태어나 사진 보다 더 정확하고 균형 있는 르네상스 예술을 익히다 새로운 예술 경향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면서 자연스럽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일생을 이 분야에 몰두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이 작품은 작가의 매너리즘에 대한 대표작만이 아니라 매너리즘을 설명할 때 대표작으로 등장할 만큼 유명한 것이다.
작가는 초기 시절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음으로 로마에까지 진출해서 기량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것이 본의 아니게 좌절되어야 했다.
당시 로마는 교황의 지혜롭지 못한 처신으로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 스페인 황제 필립피 2세가 독일 루터파 교도들이 대종인 용병들을 로마에 파견해서 로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 “로마의 약탈(Sack of Rome)”이라는 처절한 폭동으로 로마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가 되었다.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가 로마의 약탈이라는 사건을 한 “문명의 파멸” 이라는 표현으로 안타까워 했던 사건으로 작가가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또한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매너리즘이라는 화풍이 자발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동기는 그 시대의 영향도 한몫하게 되었다.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북유럽이 개신교 지역으로 변하게 되고 평온하던 유럽이 서로 적대적으로 변하는 충격 속에서 16세기 화가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과 동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확고하고 명확한 것은 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위적인 질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의 창조는 아직 그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회화는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의문 앞에 마니에리스모의 1세대 화가들은 과장과 왜곡, 파격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형태를 일그러뜨리는 유미주의적 유희의 길을 선택하였다.
작가는 매너리즘적인 표현성의 탁월함에 대해 깊은 확신이 있었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해 몰두했으나 애석하게도 37세라는 짧은 인생으로 마무리 되었기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는 다른 작가들에 의해 많은 결실을 맺게 되었고 이것은 피카소를 위시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의자에 앉으신 성모님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신다. 전통적인 르네상스 화풍의 사진 같은 정확한 모습이 아닌 긴 목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는 성모님을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는데, 이 긴목은 옆에 있는 기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체를 길게 늘어트린 것은 엘 그레코를 위시해서 매너리즘 작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법으로 현실 초월적인 성격과 과거 표현과 다르게 고아하고 숭고한 표현을 하는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모습의 성모님은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의 자세가 너무 불안정하다. 우선 아들 예수님은 아기로서는 너무 큰 데다 형태 역시 연체 동물의 모습처럼 뭔가 안정성이 부족한 모습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견한 모습이다. 과거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에서 성모님의 슬픈 표정이 수난의 예견으로 표현 되었으나 작가는 예수 아기의 형상의 불 안정성과 성모님의 무릎에 안긴 예수님이 곧 흘러내릴 것 같은 자세로 있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24세의 나이에 제작했던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와 너무도 대조되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구속사업에 동참하시는 성모님과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은 바로 세상의 불안전성을 동반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 아기를 안고 계신 성모님의 젖가슴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성화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인 성모화에선 아기 예수님께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은 항상 젖가슴을 열어놓고 있는 대담한 모습인데 비해 여기에선 현대 서구적 사고방식으로 성모님의 모성을 표현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어머니로서의 성모님 자세가 불안정한 것처럼 그분은 옥좌에 앉아 계시면서도 발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되어있다.
여섯 명의 천사가 성모자를 경배하고 있는 가운데 푸른빛 항아리가 하나 있다. 이 항아리는 예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모성의 상징이다. 중세기 작품에서 항아리는 모성의 은유적 표현으로 자주 인용되곤 했다.
이 작품을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기교적이라고 평하할 수도, 괴상한 취미를 가진 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고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상을 창조함으로서 전통적 수법을 애써 피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창조하고자 모색한 이 작품은 인습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근본을 둔 오늘날 현대 미술과 맥을 같이 하는 매우 '현대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길쭉한 변형으로 인해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인체 비례도 미련 없이 깨져나가고, 사물 간의 비례도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보통 성모가 아기 예수와 함께 등장할 때는 붉은색과 푸른색 겉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지금처럼 흰색과 푸른색 옷을 입는 경우는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색깔인데, 작가는 바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안에 무염시태 신앙 교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당시는 말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여파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였고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모 신심에 대해 근본적인 반발을 보였기에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가톨릭 신자로서의 호교론을 제시했다.
그 옆에 천사들이 이상한 모습과 자세로 있는 항아리를 들고 있는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항아리는 예수님을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은 또한 예수님을 세상에 보이는 사명을 지닌 교회의 상징도 된다.
성모님의 발 아래에는 성모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술한 차림의 남자가 기둥에 서 있다. 이 기둥 역시 그 정체를 확인하기 힘든 것이다. 위에는 하나인데, 밑은 여러 기둥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 역시 성모님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성모님은 교회의 참모습을 보이시는 분이시기에 기둥과 같은 분이심을 상징하고 있다. 하느님에게 있어 성모님을 비록 피조물에 불과하나 기둥처럼 믿음직한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아래 허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은 성서를 처음으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이시다.그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경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신약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어 70인 역에서 번역하였으나, 3차 번역에서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 번역하였다.
참으로 방대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어떤 오류도 있어선 않된다는 원칙을 기적에 가까운 완벽성으로 완성한 성서 번역이었다. 예로니모 성인의 성서 번역의 현대적 작업 과정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 자체가 바로 기적에 속하는 일이다.
그는 성서를 번역하는 사람이기 이전 성서를 자기 삶으로 살았던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 예로니모가 성모님을 손으로 가르키고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긴 세월 동안 성서를 번역하면서 만난 크리스챤의 모델은 바로 성모님 안에 드러난다는 것, 성모님의 삶 안에서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그 나름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복잡한 삶의 현실을 살아야 하는 현대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감동과 신앙의 지혜를 선사하고 있다.
매너리즘 이전의 성화는 너무도 정확한 사실성의 표현을 이상으로 여겼다. 라파엘로에게 볼 수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담은 성모님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휴대전화로 찍는 사진이 사진기로 찍는 것 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처럼 사실성의 완벽한 표현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증거한 것이 현대의 복합적인 사회 환경에서 과거의 흔적처럼 여겨질 수 있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면에서 어수선하게 보이는 작가의 작품 설정이 오히려 현대인의 감성에 맞기에 더 설득력 있는 신앙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르네상스에 완성된 성화는 더 이상 완벽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점을 제시하는 현상에서 매너리즘 작가들은 탈출해서 새로운 화풍을 통해 관람자에게 새로운 신앙의 눈을 열어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이미 4세기 전에 현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급격한 변화에서 오는 충격과 갈등을 신앙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점을 준비했다.
오늘 크리스챤들은 너무도 이해가 어려운 급격한 변화 속에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것의 의미성을 재해석해야 하는 현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보수적 경향이 강해지는 것은 현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앞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며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신앙이 보수적으로 표현될수록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세대는 교회를 떠나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6년이란 세월을 소비했으나 그의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으니 이것 역시 특별한 의미성을 지니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제작한 많은 조각들에 미완성의 부분을 남겼고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인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a Rondanini)는 작품의 많은 부분을 손대지 않고 그냥 둠으로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 이 미완성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피에타가 미켈란젤로가 많은 여러 작품 가운데 돋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미완성이 바로 완성“임을 확인한 관람자는 이 작품을 통해 미켈란젤로가 24세에 처음으로 제작한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의 완벽한 완성에서 볼 수 없는 감동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화풍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소신껏 자유롭게 표현했으며 매너리즘의 영향으로 성화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성 미술을 선보였다.
몇 년전 일본의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현대인이 찾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으로 “지하철에서 만난 예수”를 썼다. 매너리즘 작가들은 400년 전 바로 이런 표현의 예언적인 역할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