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오늘 서간은 삶과 죽음과 관련한 바오로 사도의 기대와 희망을 얘기합니다.
어떻게 살다가 죽고 싶은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희망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으로도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죽음으로도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거라고 얘기하며
그래서 빨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자기에게는 더 좋지만
이웃과 함께 더 있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것도 좋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불치병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운 엄마가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빨리 죽어서 하느님께로 가고 싶지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면
자기가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성인 중에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님이 계시지요.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순교하여 이미 성인품에 올랐지만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순교하였어도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고
현재 복녀인데 그것은 그가 한때 배교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교의 이유가 자녀들, 특히 갓난 자식 때문이었지요.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려울 것도 없고 순교하고 싶었지만 감옥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배교하였던 겁니다.
이렇게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삶을
묵상하며 나는 어떻게 살다가 죽고 싶은지
저의 기대와 희망에 대해 성찰을 해봤습니다.
우선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저 목숨이나 연명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습니다.
뒤집으면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피정 중에 피정자들에게 제가 자주 하는 그 질문, 곧
천당 가길 원하느냐 물어 모두 천당 가길 원한다고 답하면
그다음 질문으로 '지금 당장 가고 싶으냐?'고 묻는 그 질문을
다른 사람이 아닌 제게 한다면 저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더 사랑하다가 가고 싶을까요, 당장 죽어도 좋을까요?
이 지점에서 제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사랑하여도 그리스도는 사랑하지 않거나
그리스도를 사랑하더라도 인간을 더 사랑한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더 사랑하며 살다가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고
어차피 죽게 되면 그때에야 죽어 천당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야지만 당장 죽어도 좋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사람들을 위해 더 살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사랑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사랑하며 살다가 죽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모두를 사랑하는 것인지는 헷갈립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저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두렵고 거기서부터 사랑 출발을 하는 것도 두려워
이렇게 모호한 Stance/태도를 취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오늘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는 쫑파티)
http://www.ofmkorea.org/94902
15년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철회될 수 없는 하느님 은사와 소명)
http://www.ofmkorea.org/83858
12년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낮출 수 있는 높이)
http://www.ofmkorea.org/43004
10년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위로 오르면)
http://www.ofmkorea.org/4525
09년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높낮이 의식을 없애라!)
http://www.ofmkorea.org/3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