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옳다고 주장하지 않아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삶의 문제들에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목적이나 의도가 없이 분출되는 노래.
그렇게 노래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창조주의 아름다움이 관계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될 때
분출되는 기쁨은 노래가 된다.
피조물에 대한 성프란치스코의 노래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형님이며 누나요 언니라는 말로 태양과 물과 불과 땅, 온갖 피조물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들 안에서 순수한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도 다른 피조물의 일부로 생각하며 노래했다.
숨어있는 의도가 있는 사람은 노래할 수 없다.
순수함을 가장한 숨어있는 의도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고
눈앞의 이익과 편함과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관계를 해치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순수하게 삶을 깊이 바라보고
쏟아지는 비처럼 나를 적시는 은총에 마음을 열어두면
자비의 아버지께서 피조물을 통하여
나를 포옹하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심을 깨닫게 된다.
삼위일체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좋으심과
선하신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오감을 풍요롭게 한다.
그 풍요 속에서 나는 노래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통치에 의지를 내어놓는 가난한 믿음이
자신 안에 희망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고
분출되는 기쁨으로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받아들임과 베품의 놀이며 놀이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
음악과 미술과 문학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예술이다.
받아들임은 너에 의해 존재한다는 말이며 베품은 너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다.
받아들임과 베품의 관계에서 생명의 에너지가 나오고
생명의 에너지가 상호 간에 창조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것이 변화로 나아가는 관계의 혁명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아들에게 내어주셨다.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존재한다.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가 되신 아들이시다.
새 계명을 주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우리에게 그렇게 전해졌다.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는 받아들임의 극치요 베품의 극치다.
하느님 가난의 극치요 하느님 겸손의 극치다.
우리가 배우는 사랑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자신에게 덜 집중되어 있을수록 그분에게 자리를 양보해 드릴 수 있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듯 일치를 이루는 현장에는 받아들임과 베품이 있다.
가난하고 겸손하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 주는 자유로 가난을 선택하고 겸손하게 결단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묶어놓고 노예로 만드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가난이요 겸손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자유를 주고 겸손은 덕을 만들며 자유와 덕이 관계를 치유한다.
받아들임과 베품의 현장에는 언제나 자아의 죽음이 있고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 데서 나온다.
너로 인하여 내가 살고, 너를 위하여 내가 죽는 죽음이 거기에 있다.
가난과 겸손은 우리의 일상이며 죽음 또한 우리의 일상이다.
자유와 덕으로 하루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일상으로 옮겨 놓는다.
우리는 저마다 존재의 고독을 거느리고 살아간다.
존재의 고독이 시간의 물여울을 타고 흘러가는 거기,
서로의 신상을 공손히 가꾸고 돌보아주려는 생명들이 부르는 노래,
관계에서 변화를 만드는 이들이 부르는 노래,
서로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찬양의 노래,
넘치는 기쁨을 노래로 표현하는 최상의 예술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