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얘기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얘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들이 감옥에 가두지만 하느님께서 풀려나게 하신 것이
이 두 얘기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또 생각게 됩니다.
'그래, 인간은 사람을 가두고 하느님은 인간을 풀어주시지!'
그런데 왜 그런 거지?
'음, 그것은 인간은 욕심부리고 하느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 욕심은 사람을 가두고 사랑은 사람을 해방케 하는 거겠지?
이어지는 간수의 얘기는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를 풀어주면 자신의 간수직도 잃고 고초도 겪을 텐데
그는 어찌하여 그들을 풀어주었을까?
제 생각에 생계를 생각지 않고 구원을 생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 그 순간 자기 생계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묻습니다.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오로를 만나기 전에는 그리고 감옥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기 전에는
그도 구원이란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고,
먹고사는 것에만 노심초사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하고 나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다른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됐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구원의 세계라고 생각했을 거고요.
사실 이런 체험을 하기 전의 우리 인간은 보통 행복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구원의 세계를 아예 모르기에-구원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행복이 보편 개념이라면 구원은 신앙적인 개념인 거지요.
쉽게 얘기해서 스스로 행복하겠느냐, 구원받아 행복하겠느냐 그 차이이고,
행복은 꼭 구원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은 구원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 그 차이지요.
그런데 간수는 자기가 열어주지 않았고, 그들이 연 것도 아님을 알고는
직감적으로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힘이 작용하였음을 알게 됐겠지요.
구원이 이런 것이니 자기 스스로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으려 하지 않고, 구원자를 인정하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교회 안에도 New Age, 곧 신영성이라는 것이 침투했는데
호흡법이니 명상이니 단이니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력 구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빠져들지요.
저도 2-30대 때 인도 철학, 특히
크리슈나무르티나 오쇼 라즈니스 같은 이들의 철학에 빠진 적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실로 유익한 면이 있고 특히 신심의 단련이나 수양을 통해
마음의 평화 같은 것을 주기도 하기에 좋은 면이 있지만
무신론이나 범신론으로 빠질 때, 그때 문제가 되는 거지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을 주시기를 오늘 간수처럼 청하지 않고,
자력 구원을 추구하는 것인데 요즘 와서 자연치유나 건강법들 안에서도
이런 요소가 교묘히 숨어있어서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어디로>를 생각지 않는 인생)
http://www.ofmkorea.org/221672
18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우리가 해야 할 정신무장은?)
http://www.ofmkorea.org/121925
17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성령의 활동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
http://www.ofmkorea.org/103988
15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우리가 초월을 사는 방법)
http://www.ofmkorea.org/78032
13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그 아프고도 긴 사랑)
http://www.ofmkorea.org/53313
10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고통 절연, 행복 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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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 하느님의 뜻대로 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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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그리움을 타고 오는 성령의 사랑)
http://www.ofmkorea.org/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