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방식
진심으로 보고 들으려면
타인의 상황에 몰입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주는 것의 순수한 기쁨은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방식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가능한 한 최고치로 존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창조 때 각자에게 부여해주신 善性이 드러나도록 하는 요구들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발견되어 자신의 샘에서 물을 마시도록 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끊임없이 배우고 성숙해져서
하느님을 향해 변화되도록 자신을 가꾸어나가기를 바라신다.
복음이 구원이요 빛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적 삶을 통하여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포함하는 관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우월적 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배제 시킨다.
하느님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상대방이 가장 높은 단계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고
지워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가치추구가 변화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신비적 접근이라는 통합적인 진리를 율법이라는 한정적인 틀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 변화라는 구체적인 선과
그 선이 이루는 관계적 사랑에까지 안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역설은 모순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성령의 빛 안에서 조금씩 깨달을 뿐이다.
현실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변화를 회개라고 이름해도 좋은 것은
신적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는 변화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지 않고 내가 드러난다면 그것이 회개해야 하는 확실한 이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
어떤 교리나 도덕적 확신도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지키고 바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자신을 의롭게 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나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더욱 묶이게 만들고
낡은 틀 안에 갇혀있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자유롭게 할 만큼 큰 진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에서 나왔다.
그분의 눈빛, 측은한 마음, 그분의 침묵,
그분의 실천으로 발생한 언어들
관계를 맺는 방식, 아버지께 대한 무한한 신뢰,
거침없는 자비와 용서가 만든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길은 희망과 기쁨에 차 있다.
나는 나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허다한 죄와 어둠을 짊어지고 오늘도 자유롭게 그 길을 간다.
그분께서 나의 부족함을 메워주시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