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관상의 성찰
장차 있을 보상과 처벌에 연결된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어떻게 다른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가17,21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고린 6,2
이 말씀들은 뒤에 주어질 상을 바라보며 전력 질주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보고, 깨닫고, 나를 바꾸라는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이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유로운 의지로 선을 선택하는 것과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 의 구체적인 실천이
관계 안에서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의 자비와 베푸심을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는 일이다.
지키고 바치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신앙이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응답으로써 지키거나 바치지 않으면
사랑하는 일과는 무관하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일은 사랑받음에 의해서 실천으로 옮기는 동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바꾸려는 시도나 설득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육화되도록
하느님의 실재와 나의 실재가 연결되는 충만한 소통이다.
이러한 소통을 통하여 내 안에서 하느님의 충만하신 자비가
창조 때 받은 내 안에 있는 선성을 일깨워 너를 향해 자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중요한 관심사는 그분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아는 것이다.
기도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제한된 관점으로 계산하고 비교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서 끝날 때가 많다.
기도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품에서 나오는 선하심과 자비를 안다.
아버지의 품을 아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고 물리쳐야 할 원수가 없다.
측은하고 가엾은 마음으로 돌보아주려는 아버지의 자비를 알기에
너를 받아들일 품을 내 안에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너’는 고분고분한 ‘너’가 아니다.
무시하고, 거절하고, 반대하고, 나를 헤치기까지 하는 너이다.
그런 ‘너’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둠이 진할수록 빛이 선명하듯, 여건이 좋지 않을 때 드러나는 선은
‘살려내는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욱 깊이 알게 한다.
기도는 그 품으로 너를 품는 선이며 거기서 하느님의 선하심이 ‘너’를 통하여
반사되게 한다. 이것을 보는 눈이 관상이 아닐까?
기도와 관상은 내 안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 의지를 통치하도록 내어드리는 가난이요 충만한 기쁨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변화하는 사람이다.
관계적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도는
하느님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드러나게 하려는 것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관상이 육화된 선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