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가정(Holy Family : 1660)
작 가 : 바르톨로메오 에스테반 뮤리오 Bartholome Esteban Murillo : 1617-1682)
크 기 : 유채 (144x188cm)
소재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가정의 그리움은 지상 삶에서 가장 원초적인 갈망으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뜻에 의해 맺어진 가족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확대 방지와 가톨릭 신앙의 개혁과 부흥을 기치로 시작된 반종교 개혁 운동에 심취해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앙 감각을 키우는데 심혈을 기우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가의 특징은 너무 신적인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던 시대 표현을 벗어나 성화를 그리면서도 후광이나 어떤 종교적인 표현을 제한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드러나는 성성의 표현에 주력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작품의 소재에 있어서도 당시 종교화에서는 그리 거론되지 않던 작가가 살던 지역의 일상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과일 행상, 거지 소년들,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소녀들을 모델을 등장시켜 지상에서의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전통적으로 자주 표현되던 요셉 마리아 아기 예수님을 등장시켜 성가정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주제는 여러 작가들에 의해 너무도 자주 작품화된 것이나 작가는 자기다움의 특별한 표현을 사용해서 성가족의 새로운 면모를 제시했다.
작가는 우선 자신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남편이요 가장이었고 신앙적으로는 프란치스코 재속 회원으로서 나름대로 복음을 삶의 기본으로 여겨 살기로 노력하던 크리스챤이었다. 또한 자신의 평범한 가운데서 수도원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살고자 노력하는 재속 프란치스칸답게 평범성과 일상성의 바탕에서 성가족들의 삶을 그렸다.
요셉 성인이 아들 예수 아기를 안고 있다. 방안에 어떤 종교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상징물은 아무것도 없다. 요셉의 직업이 목수인 것을 상징하는 가구와 마리아가 당시 여느 여염집 여성들이 하고 있던 길쌈을 하는 물레와 큰 바구니가 전부이다.
이 부부들은 첫아들 예수가 손에 가시나무 새를 쥐고 개와 재롱을 피우는 모습을 흐뭇이 지켜보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아버지 요셉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는 너무 행복하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재롱을 떨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이다.
아기 예수는 손에 가시나무 새를 들고 아래로 재롱을 떨고 있는 개와 장난을 하고 있다. 어린이와 강아지는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한 가정의 좋은 상징이 되고 있다.
강아지는 아기 예수의 손에 있는 새를 노려보며 장난을 걸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너무도 평범한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성미술의 상징을 도입한다.
가시나무 새는 주님 수난의 상징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쓰셨던 그 가시관의 상징이기에 이 행복한 어린이의 미래에 담겨 있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의 예표이다.
너무도 평범한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작가는 그리스도가 비범함을 이런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성모님은 당시 여느 젊은 아낙네처럼 실타래가 든 광우리를 두고 당시 길쌈 도구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당시 특별한 귀족 가문의 여자들이 아니면 몸에 익은 생활 형태이다.
작가는 성모님의 모습을 일상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화는 성가족의 묘사에 있어 너무나 초월적인 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서 성가정이 일상의 삶에서 괴리된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여기 작가는 성모님의 모습 역시 너무 일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크리스찬 성덕의 바탕은 어떤 가상의 이상 공간이 아닌 현실 삶에서 표현되고 증거 되어야 함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작가도 성모님의 머리칼을 길게 그림으로서 성모님이 동정녀임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당시 일상 가정에서 익히 볼 수 있던 귀여운 장난꾸러기 어린이로 표현된 것과 다른 면이다.
아들 예수를 무릎에 앉히고 있는 성 요셉 역시 과거 전통적인 성가정에 등장하는 성 요셉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가족은 여느 인간 가족처럼 부부의 관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성모님은 동정녀이기에 요셉은 그리스도의 양부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좀 어색한 표현을 했다.
아리다운 젊은 여인 마리아와 함께 성 요셉은 대머리 노인으로 자주 표현되곤 했다. 심지어 어떤 작품에선 요셉의 목공장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아들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어색한 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성가정의 모습을 점점 현실에서 유리된 어떤 공상적인 것이면서도 가상적 현실로 돌리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성가정이 우리가 그리워 해야 할 이상이면서 본받기에는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현실이 되었다.
작가는 성 요셉을 마리아의 정배이기 이전 튼실한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오만가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든든한 가장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어색함을 느꼈던 성가정의 모델을 자연스럽게 제시하면서 우리 가까이 모셔온 현실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성 요셉과 성모님의 충실성이야 말로 성가정을 이루기에 가장 기본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성가정은 우리가 우러러 보며 공경해야 할 이상임과 동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가장 친밀한 현실의 관심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가정을 너무 천상적 차원에서 바라봄으로서 그리움으로 끝내어야 할 가상적 공간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고자 노력했던 재속 프란치스칸답게 작가는 날개 달린 귀여운 천사의 등장이나 후광과 같은 요소를 전혀 배제함으로서 성가정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400여년 전의 작품이나 오늘에도 크리스챤 가정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신선하고 감미로운 성가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신자들이 사회 안에서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여러 형태의 기도나 법적인 관점의 실천으로 냄새는 피우는데, 향기를 피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해 성경은 간단한 한마디만 전하고 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마태 1:20)
이 간단한 성경 구절에 요셉의 인품이 집약되어 있다. 몇 년 전 교황님께서는 미사 전문에 성 요셉을 위한 기도를 넣었는데 현시대의 크리스챤 가정의 모델이 되는 주인공으로 성 요셉을 정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우리의 현실 안에서 성가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이 작품은 참으로 군더더기를 말끔히 제거한 모범 답안처럼 성가정의 모델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