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는 판관기의 기드온에 관한 얘기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고 아주 매력적인 얘기인데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기드온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얘기는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주님의 용사라고 부르며 나타나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얘기하며 아주 기를 북돋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사라는 말이나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이
전혀 자기에게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고 특히 자기 민족에게는
더더욱 그런 것처럼 느껴졌는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이 질문에는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면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것과
그러니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자주 하니 이런 질문 아주 친밀한 주제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고통이 없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고통은 있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오히려 고통이 더 많고 더 큽니다.
성인들을 보면 알 수 있고 성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고통만 있지 않고 당신도 함께 있다고 하시고 그러니 우리도
고통과만 있지 말고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으라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제도 그리고 전에도 수없이 말씀드렸듯이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건이기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건 아니 계시건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자녀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고통을 없애줄 수 없고
다만 자녀의 고통에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알기 전과 비교할 때 천양지차입니다.
첫 번째 차이이고 제일 큰 차이는 고통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차이이고
그래서 고통을 무조건 거부하던 것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심지어는 감수甘受, 곧 달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받아들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 때문이고 사랑으로 함께 계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요즘 고통은 별로 크지 않은데 조그만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영혼들을 보면 한심스럽기도 하고 가엾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랑 없이 너무 큰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은 없이 너무 사랑만 유아적으로 받았기 때문인데
사랑하기에 부모들이 자식을 너무 고통을 모르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고통과 사랑이 꼭 짝이 되도록 키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이 고통의 짝이 되게 해야 최고입니다.
고통 중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체험을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은
단단해져 그래서 고통보다 더 한 것, 곧 죽음이 올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기드온은 하느님의 두려움 없는 용사가 되기 전에 그 하느님 체험을
하는데 우리도 하느님의 용기 있는 전사가 되기 위해 먼저 하느님 체험을
해야 함을 깨닫기도 하고 정성껏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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