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서로 간에 부르는 호칭에 있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보는 것은 재미있고 의미 있습니다.
천주교는 형제자매로 부르고 개신교는 집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인지 몰라도 저는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이 더 낫습니다.
형제자매는 집사보다 더 인격적이고 사랑적입니다.
한 아버지의 같은 형제자매 관계를 말하는 거잖아요?
이에 비해 집사는 사장님, 과장님 하고 부르듯이 일, 역할적인 호칭이지요.
그러나 어차피 역할적인 호칭으로 부를 바에는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반장님이나 구역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나은데 그것은
집사님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복음적인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반장님이나 구역장님은 우리 행정구역상의 통반장처럼 복음적이지 않지요.
그런데 집사란 어떤 존재입니까?
주인과 종들 사이에서 중간 관리자인 종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종이지만
주인을 대신해서 집안을 관리하는 종입니다.
그러기에 집사는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다른 종들보다 더
주인에게 충성스러워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로 늘 깨어 기다리는 것이며
복음은 이에 대해서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둘째로 충성스러움 못지않게 집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슬기로움인데
그것은 슬기롭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수직적으로는 주인에게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수평적으로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제 때에 내주는 것이 슬기로운 집사의 재산관리인데
그것은 종들이 주인의 재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바로 <정해진 양식>과 <제때에>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종들에게 주는 종입니다.
그런데 제때란 언제입니까?
바로 종들이 배고플 때이고 종들이 원할 때입니다.
집사란 자가 술이나 퍼먹고 신나게 놀다가 생각날 때 주는 것이 아니라
종들의 배고픔을 잘 헤아려 그들이 원할 때 주는 것이 제때에 주는 겁니다.
이것은 아기엄마가 아기의 배고플 때를 잘 아는 것과 같은 겁니다.
멍청하고 무책임한 엄마가 아니라면 애가 젖 먹을 때가 언젠지 잘 알듯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도 종들의 때에 민감하게 있다가 원할 때 줍니다.
다음으로 정해진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인이 정해준 양식이란 뜻입니다.
집사가 제 맘대로 아무 양식이나 막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인이 정해준 양식을 정해준 양만큼 주는 것입니다.
이는 의사가 처방한 한 대로 약사가 줘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약사가 자기도 뭐 좀 안다고 아무 약이나 정량에 맞지 않게 주면
병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도 있는데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도 그래서는 안 되고 정해진 양식을 줘야합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자문을 합니다.
나는 집사인가, 그저 종일뿐인가?
충실하고 슬기로운가, 멍청하고 제멋대로인가?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막상 좋은 기회가 와도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기회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뭔가를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는 믿음과 희망이 전제된 것일 겁니다.
세상과 사람에게 믿음과 희망을 두다 뒤통수를 맞고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왜곡된 시선으로 하느님으로 건너뛰는 것이 참 믿음과 희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와 너 모두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어야 참된
사랑으로 나아 갈 수 있음을 적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고 또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하면서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그렇습니다. 생각지 않은 때 주어지는 것이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공평하지 않을수록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는 인내의 시간을
걸어가는 제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처럼 말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http://www.ofmkorea.org/135517
17년 연중 제19주일
(두려움은 꼭 나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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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연중 제19주일
(사랑만큼 깨어있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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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좋은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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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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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사라지고 난 다음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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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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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 연중 제19주일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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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년 연중 제19주일
(관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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