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家出이 있고 出家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떠난다, 집을 나선다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가출은 좀 나쁜 뜻으로 쓰이고 출가는 좋은 뜻으로 쓰입니다.
집을 나서는 것은 같으나
목적이 있으면 출가이고 없으면 가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출은 자기의 현재에 불만하여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엠마오라는 목적지가 있으니 방황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엠마오라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떠나 딱히 갈 곳이 없어 엠마오로 향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두 제자는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쟁기로 같이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밭을 간 다음 아들에게 밭을 갈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간 밭고랑은 너무 삐뚤빼뚤하였습니다.
왜 고랑이 똑바르지 않은지 아버지께 여쭙자 아버지는
목표를 두고 소를 몰아야지 고랑이 똑바르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쟁기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고랑이 삐뚤빼뚤하였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했는데 왜 고랑이 삐뚤빼뚤하는지 다시 여쭈었습니다.
무엇을 목표로 두었는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소의 왼쪽 뿔을 목표로 소를 몰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저 앞의 포풀라 나무를 목표로
쟁기질을 하라 가르쳐 주었고
그렇게 하니 정말 고랑이 똑바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목표가 있어야 방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돈이나 출세이면
소의 왼 뿔처럼 흔들리는 목표이기에 방황하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처럼 확고한 목표이어야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 속 내용이 출세였습니다.
출세를 위해 출가를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임금이 된 예수님 덕을 볼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임금은커녕 실없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어 무작정 예루살렘을 떠나
어디로든 향한 곳이 엠마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잃고 길을 떠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십니다.
처음에는 몰라 뵈었지만 나중에서야 알아봅니다.
참 모습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출세라는 세상의 목표를 포기하니
예수님의 참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예수님을 세상의 다른 목표 때문에 따릅니다.
출세.
치부.
건강.
사교.
그러다가 자주 예수님을 잃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잃음, 실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참 예수님을 뵙게 되고
예수님과의 진정한 동행, 동반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난다, 집을 나선다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가출은 좀 나쁜 뜻으로 쓰이고 출가는 좋은 뜻으로 쓰입니다.
집을 나서는 것은 같으나
목적이 있으면 출가이고 없으면 가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출은 자기의 현재에 불만하여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엠마오라는 목적지가 있으니 방황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엠마오라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떠나 딱히 갈 곳이 없어 엠마오로 향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두 제자는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쟁기로 같이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밭을 간 다음 아들에게 밭을 갈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간 밭고랑은 너무 삐뚤빼뚤하였습니다.
왜 고랑이 똑바르지 않은지 아버지께 여쭙자 아버지는
목표를 두고 소를 몰아야지 고랑이 똑바르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쟁기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고랑이 삐뚤빼뚤하였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했는데 왜 고랑이 삐뚤빼뚤하는지 다시 여쭈었습니다.
무엇을 목표로 두었는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소의 왼쪽 뿔을 목표로 소를 몰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저 앞의 포풀라 나무를 목표로
쟁기질을 하라 가르쳐 주었고
그렇게 하니 정말 고랑이 똑바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목표가 있어야 방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돈이나 출세이면
소의 왼 뿔처럼 흔들리는 목표이기에 방황하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처럼 확고한 목표이어야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 속 내용이 출세였습니다.
출세를 위해 출가를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임금이 된 예수님 덕을 볼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임금은커녕 실없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어 무작정 예루살렘을 떠나
어디로든 향한 곳이 엠마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잃고 길을 떠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십니다.
처음에는 몰라 뵈었지만 나중에서야 알아봅니다.
참 모습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출세라는 세상의 목표를 포기하니
예수님의 참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예수님을 세상의 다른 목표 때문에 따릅니다.
출세.
치부.
건강.
사교.
그러다가 자주 예수님을 잃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잃음, 실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참 예수님을 뵙게 되고
예수님과의 진정한 동행, 동반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동행이 시작된다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쓰디쓴 경험도 달게 받아들여야 겠습니다.
진정한 목표를 위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