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하나라는 유일신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점점 더 확고하게 굳어집니다.
처음에는 여느 민족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러 신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각 민족들에는 신이 있는데,
땅 위에서 사람들끼리 전쟁을 하면,
하늘에서도 각 신들이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강하시기에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크게 지고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 다른 신보다 약하셔서
우리가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게서 다른 민족의 손을 통해
우리를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 민족의 신이
하느님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아예 다른 신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일신 신앙이 굳어집니다.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둘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하느님은 하나이신데,
또 다른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은
모습은 조금은 다르지만
그리스도교 안에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성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인지
다른 하느님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또 다른 하느님,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보니
결국 하느님은 세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이신 하느님,
유일신 신앙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세 분 하느님은
단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다른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세상에 오셨지만,
올리브 산에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이 세상으로 보내주신
분이라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각이 온전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시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
머리로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서로 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 일치는
같음을 이야기하는 획일화가 아닙니다.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오늘 복음에 따르면
서로 주고 받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성령께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영광을 아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도 아버지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또 다른 이들에게 넘겨 줍니다.
나에게는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부족한 것을
나는 주고,
나에게 없는 것을 또 다른 이에게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점점 우리는 그 삼위일체의 신비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점점 더 확고하게 굳어집니다.
처음에는 여느 민족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러 신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각 민족들에는 신이 있는데,
땅 위에서 사람들끼리 전쟁을 하면,
하늘에서도 각 신들이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강하시기에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크게 지고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 다른 신보다 약하셔서
우리가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게서 다른 민족의 손을 통해
우리를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 민족의 신이
하느님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아예 다른 신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일신 신앙이 굳어집니다.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둘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하느님은 하나이신데,
또 다른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은
모습은 조금은 다르지만
그리스도교 안에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성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인지
다른 하느님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또 다른 하느님,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보니
결국 하느님은 세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이신 하느님,
유일신 신앙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세 분 하느님은
단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다른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세상에 오셨지만,
올리브 산에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이 세상으로 보내주신
분이라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각이 온전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시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
머리로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서로 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 일치는
같음을 이야기하는 획일화가 아닙니다.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오늘 복음에 따르면
서로 주고 받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성령께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영광을 아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도 아버지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또 다른 이들에게 넘겨 줍니다.
나에게는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부족한 것을
나는 주고,
나에게 없는 것을 또 다른 이에게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점점 우리는 그 삼위일체의 신비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