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나해)
어느 성당이나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서면 우리를 맞이하는 건
제대 위에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그리스도(예수님)입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화를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분의 화를 돋우었을까요?
복음으로 돌아가보면,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졌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때이며,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며 하느님께서 지키신 약속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런 축제에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려고 모여드는 이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을 본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하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성전 정화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나는지 비추어줍니다.
축제에 참석하는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방문은 하나의 관습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쁜 축제가 아니라, 응당 선조들로부터 이어온 전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면 말도 안 되는 장사꾼들이 성전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드리려고 모인 이들에게 더 이상 정성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계명을 가르치시며 약속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을 완성하시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약의 뜻을 잃어버리고 단지 이행만을 목적으로 성전에 모여듭니다.
그리고 홍해를 갈라 자신들을 해방시키셨던 것처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인도해주신 것처럼,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잠시 제대 위를 보십시오.
그곳에서 손을 벌리고 우리를 환영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지금 저곳에서 우리를 반기십니다.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시고,
정성껏 자신을 제물로 바치십니다.
이 얼마나 극명한 대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처럼 하나의 일, 전통, 습관처럼 성전을 찾고 형식적인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마태 22,37)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내가 만나는 거룩한 장소이며, 만남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나약한 사람들임에도 이곳이 거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와 정성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느님을 만나러가는 우리의 걸음걸음에
사랑과 정성과 감사가 가득해야겠습니다.
어느 성당이나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서면 우리를 맞이하는 건
제대 위에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그리스도(예수님)입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화를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분의 화를 돋우었을까요?
복음으로 돌아가보면,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졌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때이며,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며 하느님께서 지키신 약속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런 축제에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려고 모여드는 이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을 본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하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성전 정화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나는지 비추어줍니다.
축제에 참석하는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방문은 하나의 관습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쁜 축제가 아니라, 응당 선조들로부터 이어온 전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면 말도 안 되는 장사꾼들이 성전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드리려고 모인 이들에게 더 이상 정성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계명을 가르치시며 약속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을 완성하시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약의 뜻을 잃어버리고 단지 이행만을 목적으로 성전에 모여듭니다.
그리고 홍해를 갈라 자신들을 해방시키셨던 것처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인도해주신 것처럼,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잠시 제대 위를 보십시오.
그곳에서 손을 벌리고 우리를 환영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지금 저곳에서 우리를 반기십니다.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시고,
정성껏 자신을 제물로 바치십니다.
이 얼마나 극명한 대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처럼 하나의 일, 전통, 습관처럼 성전을 찾고 형식적인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마태 22,37)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내가 만나는 거룩한 장소이며, 만남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나약한 사람들임에도 이곳이 거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와 정성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느님을 만나러가는 우리의 걸음걸음에
사랑과 정성과 감사가 가득해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의 죄를 따지지도 않으시고, 묻지도 않으시는
십자가의 예수님 !
감사드리며, 사랑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