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제가 만들어낸 말 중의 하나가 <능동적 수동태>입니다.
스스로 수동적인 자세가 되는 것인데 인간적으로 보면
수동적인 삶의 자세는 그리 좋은 자세가 아니지요.
자기 삶을 능동적으로 살지 못하고 늘 남에게 끌려가고 좌우되면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못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시켜서 청소하는 것과 사랑 때문에 스스로 청소하는 것은
겉으로는 똑같이 청소하는 거지만 천양지차이고 불행과 행복의 차이지요.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보면 수동태는 좋은 삶의 자세가 아니지만
하느님과 관계에서는 다시 말해서 영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이고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은 이런 능동적 수동태의 종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는 존재지 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닌데
오늘 이사야서에서는 우선 듣고 말하는 것이 주님이 하라하시는 대로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내가 골라 듣고 지 마음대로 나불거리지 않는 것이고,
오늘 이사야서의 표현대로 제자의 귀를 가지고 듣고
제자의 혀를 가지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귀란 우선 들으려는 귀이고, 말씀 내리시는 대로 듣는 귀이며
깨우쳐주시는 대로 알아듣는 귀입니다.
자기를 버리라는 말씀과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내리시는데
듣기 싫다고 아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나에게 맞는 말씀이요,
내게 필요한 말씀으로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모욕과 수모의 말을 듣게 되더라도 그것을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치를 당하지 않고 꿈쩍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를 당하는데도 당하지 않는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분에게 제가 간혹 ‘준다고 다 받으십니까?
싫으면 안 받으면 되지요.’라고 하는데 그런 것과 같은 맥락입니까?
아니면 누가 수치를 줘도 나는 그것을 수치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그러니까 충고로 받아들이든지 입에 쓴 약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겁니까?
이런 인간적인 방법도 매우 유효합니다.
제가 공사장에 나이 먹어 가서 무시와 모욕을 당하지만
저는 제가 원해서 욕먹을 각오를 하고 일하러 가고,
욕먹을 각오를 한 것은 그를 통해 제가 겸손해지고 작아지려는 거기에
모욕이 제게는 모욕이 되지 않고 영적 성장을 위한 영약靈藥이 되지요.
그러나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약이라는 것이 다 쓰듯
영약/영적인 약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으로는 무척 쓰고
그래서 사실 두렵고 피하고 싶고 모욕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적인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지속되기 힘들기에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것은 이런 인간적인 것 이상입니다.
예를 들어 공사장에서 모욕을 당할 때 혼자가 아니라 같이 욕을 먹으면
묘하게도 그 모욕이 반분이 되거나 아예 모욕이 안 되기도 하고
공사 책임자가 가고난 뒤 같이 키득거리기도 하고 우리는 오늘
같이 욕을 먹은 동지가 되었다는 느낌도 주고 서로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이 옆에 같이 있어도 이렇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데
하느님께서 옆에 계시면 더더욱 위로와 힘이 되겠지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