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제도 얘기했지만 오늘 요한복음도 참으로 요한복음답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늘얘기를 하고 사람들은 땅 얘기를 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안에서의 참 자유에 대해,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노예 된 적이 없다 합니다.
그래서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우리라고 겸손하게 인정한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주님 말씀하실 때 나도 노예 된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않는지, 참 자유를 누리고는 있는지 우리도 성찰해야 합니다.
요즘 저로 말하면 전에 비해 공간적으로 비좁은 곳에 살기 때문인지
작은 공간에서도 행복을 느끼면서도 간간이 제 자유공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할 때도 있고, 시간의 자유도 더 있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한 주일에 한 번 수녀원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데 지난주에는
수녀님 한 분이 수녀원에 와 있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고 하실 때
수녀님이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은, 제 마음이 들킨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제가 느끼는 부자유와 제가 원하는 자유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부자유를 느낄까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좁으면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어서 좋고,
저만의 시간이 없어도 늘 같이 있는 것이 즐겁고 좋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면 예를 들어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있을 때 부자유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과 윗사람은 아랫사람과 있을 때 부자유하며
눈치 보는 사람은 눈치 주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부자유하겠지요.
그러니 지금 누군가 같이 있는 것이 부자유하다면 그를 너무 존경하여
어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를 사랑치 않기 때문이고,
부자유하면 할수록 그를 덜 사랑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도
여러 다른 작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이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아직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다면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편하고 자유로울 것이고,
우리는 진정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갈 것입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을 벗어나 내 마음대로 가고 싶고,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내 생각대로 살고 싶다면,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해진다면 그런 나의 자유는 죄의 자유이고,
죄의 자유로 인해 나는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내 소유가 따로 있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만의 자유를 찾아 아버지를 떠났는데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혼자 중얼거립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나의 자유가 죄가 된 것이고, 자유를 원한 것이 노예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요즘은 저마다 Privacy/사적인 공간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아무도 그 안에 들어오길 바라지 않고 그럼에도 들어오면 침범이 됩니다.
그런데 나만의 자유로운 사적 공간에 외려 내가 갇히는 역설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