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오늘은 독서와 복음을 연결시켜서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오늘 집회서의 첫 마디는 “예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입니다.
복음의 앞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간 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간 것인데
이때 주님은 집회서 말씀처럼 주님을 섬기러,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수난을 당하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데 비해
제자들은 주님을 섬기러 간 것이 아니라 자기욕심을 채우러 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련에 대비하시고 제자들에게도 시련에 대비하라하시지만
제자들은 시련/수난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차지할 자리를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있으며 자리를 놓고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앞두고, 미래를 앞두고 우리도 자신을 생각게 됩니다.
집회서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오늘 제자들과 같은 사람인가?
어제 지혜에 대해 묵상을 했는데 미래를 대비함에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이 바로 각오와 기대의 차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각오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선을 기대하며,
더 지혜로운 사람은 늘 최악을 각오하고
더 어리석은 사람은 늘 최선을 기대하지요.
그래서 오늘 집회서는 시련에 대비하여 재난이 닥쳐도 허둥대지 말라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이 말씀과 달리 선을 기대하다가 기대와 다른 결과에
실망을 하고, 당황하여 허둥대며, 불행해지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최악을 각오했기에 최악의 결과가 나와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담담하게 대처하며 안정과 평화를 유지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좀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대는 좋은 결과만 받아들이려는 것이고,
각오는 최악의 결과를 포함하여 뭐든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뭐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활짝 열어놓을 때
그리로 하느님까지 들어오십니다.
주님과 십자고상을 생각해봅니다.
십자가와 달리 십자고상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계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따로 예수님 따로 껴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만 껴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예수님도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받아들임과 하느님이 들어오심을 더 발전시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아주 특별한 논리, 그러니까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거라는 논리를 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당신과 아버지가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문과 당신을 받아들이는 문과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문이 각기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느 것에는 열리고 어느 것에는 열리지 않는 그런 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는 열리고 누구에게는 열리지 않는 그런 문도 아니라
모든 것에 그리고 누구에게나 문을 열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도 들어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입니다.
모두가 도둑놈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지요.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 자신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문을 열수 있다는 뜻입니다.